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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에 그려진 고졸한 집이 이곳이었을까

추사가 자주 드나든 석파정 사랑채 별당 월천정을 옮겨온 부암동 석파랑

등록 2021.06.13 15:11수정 2021.06.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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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권력과 시류에 아부하는 눈 먼 기회주의자들은 어느 시·공간에나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객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속담이 이를 비유적으로 꼬집는다. 지조의 문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 편은 '(혹한의) 한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고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고 기술한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도 '세한도(歲寒圖) 발문(跋文)'에 이를 비유하여 적는다.


소동파가 유배당해 괴로움을 겪을 때, 위안 차 먼 길을 달려온 아들에게 그려줬다는 언송도(偃松圖)가 있다. 그림은 사라지고 조각난 52자 찬문만 남는다. 1809년 아버지를 따라간 연경(燕京) 길, 소동파를 흠모하던 추사는 옹방강 서재에서 '비스듬한 늙은 소나무, 가지 드리워 집에 기댔네(古松偃蓋全攲戶)'라는 그의 시와 찬문을 보고 굳은 지조를 읽어낸다.

시련을 겪는 추사와 세한도

효명세자는 시대의 질곡과 안동김씨에 맞서 싸운다. 병든 순조의 명으로 1827년 대리청정을 시작하나, 많은 의혹을 남기고 3년 만에 죽고 만다. 곧바로 안동김씨 반격이 시작된다. 세자 세력을 축출하려 격렬한 정쟁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추사 부친 김노경(金魯敬)이 1830년 고금도로 유배당한다. 김우명의 탄핵이 윤상도 사건을 거치면서 내려진 형벌이다.
 

제주도 대정 추사 적거지 추사가 위리안치 형을 받고 약 9년 간 유배생활을 한 제주도 대정 적거지. ⓒ 문화재청


10년 후엔 같은 사건으로 추사가 억울한 유배를 당한다. 양사(兩司)를 안동김씨가 장악한다. 아버지를 탄핵한 김우명이 대사간, 추사를 미워하는 김홍근(金弘根)이 대사헌이다. 홍근이 10년 전 윤상도 사건 배후를 캐야 한다며 추사를 탄핵한다. 조인영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은 구하나, 제주 대정 땅에 위리안치된다.
    
모든 게 당당하던 추사는 제주 생활이 무척 괴롭다. 덥고 축축한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에 풍토병에 시달리고, 음식도 거칠어 입에 맞지 않는다. 질병은 늘 달고 살아 눈도 침침하고, 간혹 입이 아파 먹는 것도 시원치 않다. 무엇보다 시·서·화를 논할 친구가 없다. 1842년엔 부인마저 세상을 버린다. 가까운 벗들도 소식이 뜸하거나 끊긴다.

초의와 소치의 방문이 반가울 뿐이다. 오로지 의지할 바는 책이고 학문이다. 책을 구해달라는 잦은 편지에 집안에서 조차 전전긍긍이다. 요구하는 분량도 방대하지만, 어떤 책은 중국에서도 쉬이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만이 추사의 주린 학문 욕을 채워준다. 귀양 5년차가 되었어도 극진한 정성이 변함없다. 연경을 왕래하며 많은 책을 가져온다. 특히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는 물론,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가져다준다.


추사는 감동한다. 작은 벼슬자리에 버금가는 가치 있는 책들이다. 추사는 제자의 변치 않는 마음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언송도의 찬문 글씨가 떠오른다. 날이 차가워진 후에야 드러나는 송백(松柏)의 지조를 떠올리며, 제자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낸다. 세한도다.
  

세한도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준 세한도. ⓒ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는 문인화(文人畵)다. 실경이 아닌 작가의 내면세계를 형상화한 그림이다. 형상화된 이미지는 작가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들이다. 아울러 격조와 문기(文氣)가 조화를 이뤄냈다. 그림은 예스럽고 소박한 고졸미가 전부다. 여기에 '歲寒圖' 서체와 글자크기, 아래로 내려 쓴 '藕船是賞'과 '阮堂' 글씨, 찍힌 여러 낙관이 그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껏 격을 높인다. 세한도가 명화로 칭송받는 이유다.

세한도가 귀환되기까지 

우선이 세한도에 16명 중국학자 찬시를 받아온다. 우선이 죽고 제자 김병선을 거쳐, 그 아들 김준학이 소장한다. 다시 친일파 민영준(민영휘)이 소장하나, 그 아들 민규식이 경매에 내놓는다. 이를 추사 연구가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隣)가 낙찰 받는다.

1943년 여름, 추사를 존경하던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후지츠카에게 "세한도를 넘겨 달라" 담판한다. 후지츠카는 "추사를 존경해 고이 간직하겠노라"며 거절한다. 1944년 여름,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비롯한 수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도쿄로 가버린다. 전쟁 막바지를 직감한 것이다. 소전은 세한도만이라도 찾아 올 결심으로, 도쿄 후지츠카 집을 찾는다. 도쿄는 미군 공습이 한창이고, 후지츠카는 노환으로 병중이다.

거듭 세한도를 넘겨받을 의사를 전달하나, 후지츠카는 단호하다. 소전은 그림의 뜻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두 달을 매일 지극정성으로 문안드리며 당부한다. 후지츠카도 그림의 뜻을 잘 헤아린다.

자신이 죽으면 소전에게 넘길 것이니 돌아가란다. 그래도 소전 태도엔 변함이 없다. 후지츠카는 진정으로 그만이 그림을 간직할 자격을 갖췄음을 알아차린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명작이니 잘 보존하라"며 건네준다. 1944년 12월 세한도가 되돌아온다.

1945년 3월 초. 후지츠카 연구실이 미군 공습을 받아 많은 소장품이 소실된다. 다행히 추사와 북학파 자료들은 집에 보관되어 소실을 면한다. 이렇게 보존된 15,000여 점 유물을 2006년 아들 아키나오가 과천문화원에 기증한다.

소전은 1958년 제4대 민의원으로 정치에 뛰어든다. 절치부심 제8대엔 국회의원도 지내지만 과정에서 늘 돈이 부족하다. 소장품을 저당 잡힌다.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삼성 이병철, '세한도'는 사채업자 이근태에게 맡기나 결국 소유권을 잃고 만다. 이후 세한도는 안목 높은 수집가 손세기를 거쳐, 그 아들 손창근 소유였다가 2020년 2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다. 이들 부자는 국보급 등 귀중한 서화류 수백 점을 기증한 바도 있다.

석파정에 있었던 석파랑 그리고 세한도
  

석파랑 입구 세한도와 언덕 위 석파랑 집 전체는 소전 손재형이 말년에 작품활동을 위해 지은 집이다. 석파정 사랑채 별당(월천정)이던 석파랑은 1958년에 소전이 이곳으로 옮겨와 보존되고 있다. ⓒ 이영천

 
흥선대원군이 별서로 소유하던 석파정에서 사라진 건물이 몇이다. 세한도를 되찾아 온 소전이, 1958년 옮겨 놓은 서울 부암동 석파랑(石坡廊)도 그 중 하나다. 석파정 사랑채 별당이 옮겨와 석파랑이 되었고, 지금은 음식점에 딸린 별채로 남았다.

석파랑은 추사가 자주 찾아 머물던 곳이다. 옮기기 이전 석파정에서는 월천정(月泉亭)이라고도 불렀다. 추사는 김흥근(金興根) 큰형 홍근의 탄핵으로 유배형을 받는다. 하지만 석파정 주인인 동생과는 막역한 사이다. 흥근은 추사를 자주 초대하여 대접한다. 그때마다 추사가 머문 곳이 바로 월천정이다.
  

석파랑 좌측 반월창과 우측 만월창 벽돌벽이 이색적인 풍모를 자아낸다. 소전은 이 건축물이 세한도 속 집이라 여겨 이곳으로 옮겨 온다. ⓒ 이영천

 
세한도가 그려낸 것은 지조다. 귀양 온 궁한 처지의 스승을 향한 굳센 마음이다. 세태와 처지가 변한 후에야 비로소 송백(松柏)의 푸름이 돋보인다. 굳센 지조가 갈필(渴筆)로 그려진 쓸쓸한 나무로 태어난다. 지조의 고졸한 표현이다.

소전도 이상적의 마음을 잘 안다. 이상적의 마음으로 일본인을 설득해 세한도를 되찾았다. 소전이 석파랑을 어찌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세한도를 되찾아온 기쁨과 그림에 그려진 실물이라 여긴 집을 같이 느끼고 그리워했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세한도 부분 늙은 소나무와 몽환적인 잎으로 그려진 3그루 잣나무, 그리고 소실점이 다른 고졸한 집은 'ㄱ'자로 그리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측 상단의 글과 낙관, 하단 좌우에 찍힌 낙관이 그림과 조화롭다. ⓒ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집은 오직 선으로만 그렸다. 늙어 축 늘어진 소나무는 잎이 몇 남지 않았다. 집을 에워싸고 있는 잣나무는 잎 뻗침이 몽환적이다. 흐릿하게 퍼져 보인다. 'ㄱ'자 모양 집을 그리려는 의도가 엿보이나, 어딘지 모르게 서툴고 어색하다.

그려진 집은 간결하나 모호하다. 벽엔 둥근 만월(滿月)창이 있다. 시선이 다른 곳에 머문다. 뚜렷하지 않은 소실점이 그림 속에 엇갈린다. 집을 바라본 시선은 오른쪽이나, 창을 바라본 시선은 왼쪽이다.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림엔 휭하니 불어오는 차갑고 쓸쓸한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집과 바람이 추사 자신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송백이 더 푸르러 보인다.
  

석파랑 만월창 세한도에 그려진 만월창으로 추정되는 석파랑 만월창. 짙은 회색의 중국식 벽돌이 둥글게 안팍으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붉은 벽돌로 문양을 넣었다. 전통창호로 만든 안문 밖으로 유리창을 들여 비바람을 막게 하였다. ⓒ 이영천

 
석파랑은 'ㄱ'자 집이다. 정면에서 보아 바로 보이는 벽에 반월(半月)창이 정갈하다. 우측 벽엔 만월창이 둥글다. 세한도에 그려진 만월창, 실물로 추정되는 창이다. 집의 벽과 창은 청나라 근대건축을 모방한 흔적이 뚜렷하다.

건물은 앙증맞은 새를 연상시킨다. 무척 사랑스럽다. 가운데 대청을 배치하고 양 옆으로 방을 두었다. 한옥기와에 앞뒤로 툇마루가 있다. 번잡한 것이 생략되어 단순하고 담백하다. 그 부분을 벽돌 벽 반월창과 만월창이 대신하는 집이다.

집 모양과 나이는, 당시 우리가 근대로 들어서는 길목이었다 말하고 있다. 흥선대원군도 석파정 사랑채 별당(당시 월천정)을 애용해 대청에선 곧잘 난(蘭)을 치곤 했다. 석파란(石坡蘭)이다. 석파란도 추사의 맥을 잇는 그림이다.
#석파랑 #추사 김정희 #우선 이상적 #소전 손재형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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