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엄마를 위로하는 딸아이의 특급 상황극

등록 2021.05.28 16:15수정 2021.05.28 16:2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전 퇴근했더니 조금은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가 몸으로 느껴졌다. 아침부터 고3 수험생 아들과 등교 문제로 다툰 아내의 기분이 저기압인 듯 보였다. 아내는 김 빠진 콜라처럼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상태로 멍하니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아내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딸아이에게는 화장을 닦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눈치가 빠른 딸아이는 아내의 기분을 풀기 위한 특단의 상황극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저희 숍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손님을 모실게요."
"무면허 업소면서 당연히 저렴해야죠. 그래서 얼마인데요?"
"오늘 처음 오시는 손님이니 오십퍼센트 할인해서 삼천 원에 모실게요."
"무면허면서 비싸기도 하네요. 하는 거 봐서 입금할게요."


그렇게 시작한 상황극은 평소와 똑같이 아내와 딸아이의 티키타카로 계속되었다. '제대로 닦아주셔야죠', '서비스가 이게 뭐냐고요', '제 값 주고 하는 게 아니어서 오십 퍼센트만큼 하는 겁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등.

그렇게 5분여를 씨름하던 딸아이와 아내는 이내 했던 화장이 다 닦였다는 걸 깨닫고 세안을 하러 욕실로 이동했다. 딸아이는 욕실까지 쫓아들어가 아내의 세안을 돕고, 세안 후 기본적인 케어를 위한 스킨과 로션 서비스까지 해줬다.

이런 딸아이의 서비스에 만족한 아내는 흔쾌히 딸아이 통장으로 삼천 원을 입금했다. 입금 확인을 한 딸아이는 아내에게 감사 인사를 90도로 하더니 조용히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어디론가 카톡을 보냈다. 딸아이가 카톡 전송 버튼을 누르자 아내 옆에 있던 아내의 스마트폰에서 '카톡' 하고 알림음이 울렸다. 카톡 내용을 본 아내는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주면서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내가 읽어준 이 카톡 내용 때문에 나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이 숍의 인턴 직원이 되어 있었다. 
 

메시지 딸과 아내가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 ⓒ 정지현

 
"김 인턴님, 고객님이시니까 회원 가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네~? 하하.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회원님~."



결국 아내는 딸아이 통장으로 거금 3만 원을 입금했다. 딸아이는 아내의 기분을 풀려고 시작했던 상황극인데 실제 자신의 통장으로 아내가 돈을 입금하자 놀라움과 감사함의 중간쯤 되는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아내를 보았다. 입금을 확인한 딸은 급하게 마지막 회원가입 축하 메시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사실 오늘 아내의 일진은 아침부터 사나웠다. 아들과 등교 문제로 감정이 상했고, 늘 다니던 텃밭에서는 함께 일하는 지인들에게 가라앉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서운할 수도 있는 표현을 했다고 했다. 게다가 자주 가는 꽃집에서 항상 반갑게 맞이해주시는 사장님이 왠지 오늘은 자신을 반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감정을 고스란히 안고 집에 온 아내는 저녁 때까지 감정이 회복되지 않아 힘들었는데 눈치 빠른 딸아이의 상황극에 감동받아 '울컥'했다고. 딸아이와 티키타카로 웃을 수 있어서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난 아내에게 결국 아침 시작부터 좋지 않은 감정 상태여서 하루가 모두 그렇게 느껴졌을 거라고 얘기했다. 텃밭의 지인들은 오래 함께해 온 분들이라 아마 아내의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테고, 꽃집 사장님은 사장님 본인이 오늘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자신의 탓을 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사람 사는 게 사소한 문제로 감정도 상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렇게 따뜻한 웃음으로 그런 상한 감정도 날려버릴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우리 집에는 상한 감정을 오래 묵힐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상황극의 달인과 티키 타카하는 유쾌한 가족들이 있어서. 오늘 우리 가족의 하루도 그렇게 저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가족 #사랑 #행복 #아내 #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따뜻한 일상과 행복한 생각을 글에 담고 있어요. 제 글이 누군가에겐 용기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