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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로 몰려 죽은 아버지, 아들은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 서울시 교육위원 최홍이의 가족사...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아버지 최원복

등록 2021.06.19 11:35수정 2021.06.2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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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최홍이는 서울 용산공업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의 마음 한켠에는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3년 전 서울 신용산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한 이래 '기회가 되면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좋은 대학에 제자들을 많이 보내겠다'는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업고등학교라고 해서 가르치는 일을 등한시할 그가 아니었다. 그런데 교장이 최홍이에게 맡긴 과는 '자동차과'였다. 당시 자동차과는 기계, 전기, 통신, 전자, 토목, 금속과에 이은 비인기반이었다. 게다가 그는 교육 환경이 훨씬 열악한 야간반을 맡게 됐다.

최홍이는 교장에게 항의했다. "교장 선생님, 제가 왜 자동차과를 맡아야 하나요?" "당신이 서울대 나온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명문대 나온 것도 아니구, 하다못해 지방 정규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잖아요." 교장의 말에 그는 충격에 빠졌다.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 아니면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도 상대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이 헛된 것임을 반성했다.

그는 '모든 곳에서 최선을 다하자'며 마음을 다잡고 교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학생들의 배움 열정은 제로에 가까웠고 담임교사인 최홍이는 1년 내내 허탈과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그해 12월 그는 자동차과 학생들에게 "토요일 12시까지 전부 한강대교 제1교각으로 오라"고 했다.

그날 한강대교에 모인 학생들에게 그는 "나랑 함께 모두 한강에 빠져 죽자"고 했다. 학생들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너네가 부모 잘못 만났다고 그렇게 공부 안 하느니, 죽는 게 났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잠시 후 학생들은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잘 할께요"라며 울먹였다.

그 졸업생 중 10여 명이 기업체 대표와 임원, 교수가 되어 2021년 지금까지도 최홍이와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최홍이는 그만큼 학생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넘치는 교사였다.

독립운동을 한 이가 보도연맹?


"계세요." "누구세요?" 자신을 충남 논산군 양촌지서장이라고 밝힌 그는 대뜸 "영감님, 축하드립니다"라고 했다. "예?"하며 얼떨떨해 하는 그에게 지서장은 전보를 내밀었다. '고시합격 급(急) 상경요망'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홍이는 그해 중등교원 시험에서 합격했는데,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고시 합격'이라고 전보를 친 것이다. 당시에는 (사법)고시 합격자를 '영감님'이라고 불렀고, 이런 연유로 지서장이 직접 전보를 갖고 오기까지 했다.

지서장이 최홍이에게 '영감님'이라 부른 것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하지만 최홍이가 중등교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인생역전'에 더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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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복(최홍이의 부친)

 
최홍이의 아버지 최원복(1908년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관련으로 충남 홍성군 홍성공업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최원복은 만주와 북조선을 오가다가 흥남 알루미늄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해방 후 남조선 출신자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자 1946년에 월남을 했다. 고향인 홍성군 구항면에서 최원복은 지역 명사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1949년에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자 그는 강제 가입해야 했다.

하지만 최원복은 좌익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해 좌·우익이 대립할 때 그는 언제나 좌·우 합작을 주장했다. 좌파 후배들에게 "싸우지 마라. 관공서 습격하지 마라"고 타일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에게는 좌·우 합작론자도 '빨갱이'로 취급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원복은 구항지서로 연행되었고 1950년 7월 11일 광천읍 담산리 폐광 근처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최원복이 학살된 광천읍 폐광에서 발굴된 유해. 출처-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


최원복의 죽음으로 가족의 고통과 수십 년간 이어졌다. 최원복의 아내 전감예는 홍성과 광천의 장날마다 고추를 내다 팔았다. 장까지는 5~8km 걸렸는데 집에서 걸어서 갔다.

큰딸 최옥래는 경기도 파주에서 군복 수선하는 가게를 차렸다. 옥래 동생 혜자와 윤숙은 통신강의록으로 공부를 하는 한편 언니 가게에서 일하기도 했다. 혜자는 미군과 결혼해 1965년경 미국으로 갔다. 혼인신고를 하고 미국으로 가는 것이기에 신원조회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윤숙이 1970년에 취업이민을 갈 때는 신원조회에 걸렸다. 결국 '반한(反韓)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나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최홍이는 충남 홍성군 홍성중학교 2학년 때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28kg이 나왔다. 영양부족이었다. 그의 집안은 도시락을 쌀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당시는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는데 최홍이는 중학교 3년 내내 1번을 도맡았다. 

이후 어렵사리 들어간 홍성고등학교는 6년 만에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최홍이는 용기를 내어 고등학교 서무과장(현재의 행정실장)에게 사정했다. "두 달만 봐주세요." 그가 어렵사리 돈을 장만해 두 달 후 학교를 찾아갔을 때, 이미 반 편성에서 최홍이는 제외된 상태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64년도에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학력과 '빽'이 없었던 그는 춘천 수송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제9범죄수사대(CID)로 가게 된 최홍이는 신원조회에 걸려 비밀인가 취급이 불허되었다. "행정과장님 저 일반 보병으로 갈랍니다" "최홍이, 네 잘못이 아니잖아"라며 만류했다. 최홍이의 아버지가 6.25때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은 것에 대해, 군 행정과장이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제대 후 최홍이는 '대한민국에서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곳은 어디일까'를 고심하다가 결국 '교직'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66년 가을부터 친구들에게 고등학교 책을 빌려 공부를 시작했다. 4개월 만인 1967년 1월에 치른 공주교대 시험에서 5: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을 했다.

1969년도 논산군 양촌면 동산초등학교 첫 발령을 받은 그는 그해 말 중등교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니 고등학교를 6년 만에 졸업하고 공주교대도 어렵게 다닌 그가 중등교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인생역전'이라 할 만한 했다.

서울시 교육위원을 세 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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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이 ⓒ 박만순


최홍이의 교직 생활은 '비상식'과의 투쟁, 그 자체였다. 그는 첫 발령지인 논산군 양촌면 동산초등학교 재직 시절 월급명세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도서 구입비가 1,700원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월급 12,000원 받던 1969년도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니 충남교육청과 논산교육청에서 <어린이 자유>(중앙정보부 발간)와 <어깨동무>(육영재단 발간)를 강매한 것이었다. 교사들에게 무조건 나눠준 것이 '도서구입비'로 둔갑했다.

최홍이는 이같은 사실을 <동아일보>에 제보했고, 사회면 기사로 보도되자 교육청에서 난리가 났다. 논산교육장이 "낙도(落島)로 보내겠다"고 협박했지만, 그는 오히려 충남교육청 학무과장에게 항의했다.

교직사회 내 부정과 부조리에 그는 눈을 감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1989년 전교조가 만들어질 때 후배교사들이 함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가족사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2002년도에 교육위원이 신설되자 출마하라고 후배 교사들의 성화가 자못 컸다. 교육개혁을 향한 의지가 큰 강물이 되어 사회에 물결칠 때였다. 그는 2002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에서 교육위원을 세 번 했다.

12년간의 교육위원을 수행한 최홍이(1942년생, 충남 공주시 사곡면 유등리)는 아버지 사건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다.
#최홍이 #최원복 #교육위원 #국민보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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