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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운동 다룬 이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

[리뷰]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21.05.02 11:54최종업데이트21.05.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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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막이 올라가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90분 동안 북받친 분노와 삭이던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다. 홀로 울음을 삼키거나, 생면부지의 옆 사람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어깨를 다독이는 이들. 객석은 이내 환해졌지만,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난달 30일, 이달 12일 개봉을 앞둔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의 시사회에 다녀왔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년에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인데, 코로나로 인해 한 해 미뤄진 것이다. 광주광역시와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서 제작을 지원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광주에서 촬영된 데다, 다큐멘터리 기법이 가미되어 사실감을 높였다. 주인공 오채근(안성기 분)이 영화 밖 인물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마치 감독이 촬영하다 말고 배우로 등장하는 모양새지만, 어색하기는커녕 이야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미리 전제해둘 게 있다. 이 작품은 5.18을 소재로 한 상업 영화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어설픈 소감이 개봉을 앞둔 영화에 자칫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영화의 문외한인 난 이 작품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평가할 만한 깜냥이 못 된다.
 
5.18을 직접 경험했거나 잘 알고 있는 이라면, 이 작품이 상업 영화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인 당시의 피해자, 유가족 등의 고통이 그대로 포개진다. 영화 속 대사는 '연기'가 아니라 '진술'에 가깝다.

'작위' 없는 영화 속 시공간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관련 이미지. ⓒ 영화사 혼

 
영화 속 시공간의 배경에 일말의 작위도 없다. 무등산부터 시내의 허름한 뒷골목 식당까지 공간도 사실적이지만, 여전히 5.18을 북한군이 개입된 폭동으로 왜곡하고 폄훼하는 태극기 부대와 극우 유튜버의 망언까지도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배우조차 실존 인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배경 음악에서도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감독의 노력이 엿보인다. 남녀 주인공인 오채근과 진희(윤유선 분)의 인연의 끈으로 삼은 노래는 5.18 당시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김정호의 <하얀 나비>다. 1975년 발표된 이 곡은 지금까지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명곡 중의 하나다.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관련 이미지. ⓒ 영화사 혼

 
가수 김정호의 생애 또한 음악 못지않은 사실적 요소로 작용한다. 그가 태어난 곳이 무등산 자락 지실마을이며, 전두환의 철권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85년 고작 서른셋의 나이로 요절했다. <하얀 나비>를 배경으로 5.18 당시 학살된 아이의 주검을 찾아 주인공이 무등산에 오르는 장면은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다분히 거칠고 감성적인 부분도 있다. 불량배들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해온 민우(김희찬 분)가 끝내 칼을 꺼내 들고 복수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누구는 5.18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옥에 티'라고 말하지만, 난 그조차 사실성을 높이려는 감독의 처절한 노력이라고 본다.
 
피해자는 주눅이 들어 숨죽이며 사는데, 외려 가해자는 희희낙락 떵떵거리고 사는 뒤틀린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학교도, 사회도, 나아가 우리 역사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은연중에 들려주려는 것이다. 불의한 사회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각인시켜주는 장면은 없다.
 
오채근이 민우에게 자신을 괴롭힌 그들에게 복수하라며 칼을 쥐여주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참담하다. 주저하며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마는 민우의 모습을 통해 5.18 피해자의 현실을 떠올려보라는 뜻일 테다. 호의호식하고 있는 5.18 가해자들을 단죄하지 못한 채 '사적 복수'만이 유일하게 남은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불편하다.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이 영화를 본 소감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바로 이것이다. 불편함. 41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과 법적 처벌은커녕 가해자의 양심 고백조차 거의 없는 현실을 다시 또 깨닫게 돼서다. 대체 언제까지 그들의 처벌과 사과를 구걸해야 하는지 묻게 되는 불편함.
 
<영화 26년>과 같은 모티프

이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순간 떠오른 작품이 있다.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2012년 개봉된 영화 <26년>이 그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내용도, 구성도, 등장인물도 다 다르지만, 5.18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사적 복수'라는 모티프가 같아서다.
 
'26년의 기다림, 복수는 시작되었다.'

영화 <26년> 홍보 포스터의 한가운데 적혀있는 문구다. 비록 영화일지언정 '더 늦기 전에 용서를 빌라'고, '우린 그 사람한테 사과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다'고 강조하며, '사적 복수'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그 사람을 단죄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났다.
 
"자그마치 26년이야! 지금 아니면 다시 기회는 없어!"
"그 사람이 사죄하게 만드는 것, 그게 제 목적이에요."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명대사다. 메시지는 강렬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울림은 거의 없었다. 영화는 대리 만족의 수단일 뿐,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자그마치 26년'이 '무려 41년'으로 바뀌었지만, '그 사람'도, '그 사람'을 추종하던 이들도 그때처럼 무탈하게 잘살고 있다.
 
'반성 없는 세상을 향해, 그의 복수가 시작된다.'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의 홍보 포스터 문구에 기시감이 드는 이유다. 26년 동안 사죄하지 않은 '그 사람'이 41년이 지났다고 개과천선할 리 없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법은 무기력했고, 정치는 무책임했다. 남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 속 '사적 복수'뿐이다.
 
10년 터울인 두 영화의 차이가 있다면, 화살이 사죄하지 않는 '그 사람'에서 반성이 없는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태극기 부대와 극우 유튜버, 교회 등의 반사회적 행태를 꼬집어 메시지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5.18 학살 책임자 중 한 사람인 박기준(박근형 분)의 외마디 대사는 단연 압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잖아."
 

극도로 사실적인 영화임에도 눈물을 쏟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노라니 판타지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오채근이 어서 빨리 나와주기를 학수고대하는 간절함이 배어있어서다. 광주 사람들이 '그 사람'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오채근에 대한 기대는 아직 접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그렇게 당하고도 왜 참고만 있는지" 안타까워하며 광주 사람들의 착함을 나무란다. 하지만 그들은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복수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광주 사람들은 언제든 용서할 준비가 돼 있다. 관객의 눈물이 그 증거다.
 
감독은 5.18에 대해 잘 모르는 청소년들과 다른 지역 사람들이 많이 관람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러나 난 5.18 피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이 먼저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들이 그토록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모습이라,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물론, 그것을 영화가 아닌 현실로 구현하는 건 우리 시민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오채근의 반지하방 서가에 꽂혀있던 불온서적들과 죽은 아들의 휴대전화가 민우에게 건네지는 장면이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영화관을 나오려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사적 복수'를 모티프로 하는 영화는 부디 이 작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긴 5.18 학살 책임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이런 노력마저도 사라질까 두렵기도 하다.
아들의 이름으로 5.18 민주화운동 임을 위한 행진곡 26년 하얀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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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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