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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답안' 알지만... 아이들도 기대를 접은 눈치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온전한 추모 행사를 위한 전제조건은 진상규명

등록 2021.04.16 14:12수정 2021.04.1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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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회 아이들 ⓒ 서부원

   
해마다 교정에 4월이 왔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있다. 영롱한 목련이나 화사한 진달래, 철쭉 같은 봄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산으로부터 봄바람에 실려 오는 노란 꽃향기에 앞서 내걸리는 교문의 현수막이 그것이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적은 세월호 현수막.

4월의 시작과 함께 현수막이 걸리고, 학생회를 중심으로 아이들은 분주하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눈코 뜰 새가 없다. 다짐의 손편지 쓰기, 노란 종이배 접기, 기억의 벽 설치 등 7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아이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대견스럽다.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오리고, 접고, 붙이고, 세우고, 꽂느라 연신 땀 흘리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세월호가 어떤 의미인지를. 또, 이번 7주기의 다짐은 무엇인지를. 예상대로 모두가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돈보다 생명, 이윤보다 안전이 먼저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고 했다.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이들 모두 '모범답안'은 알고 있었지만, 말끝에 힘이 없어 허공을 맴돌다 흩어지는 듯했다. 무려 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뭐 하나 해결된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다.

아이들은 참사가 일어난 이듬해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는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마을 주민과 함께 추모 음악회도 열었고, 거리 캠페인도 전개했으며, 작년엔 교정에서 플래시몹 행사도 했다. 주어진 여건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일까.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젠 아이들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은 눈치다. 지난 정부의 집요한 방해와 현 정부의 나태함으로 부침을 겪어온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 시한이 아직 1년 더 남았다는 사실도 관심 밖인 듯했다.

'성과'가 없으니 시나브로 지쳐가는 거다. 아무리 '질긴 놈이 이긴다'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 바람도, 다짐도, 의지도, 노력도 힘을 잃은 채 또 하나의 관행이 돼가고 있다. 어느덧 세월호 추모 행사는 국경일에 국기 게양하듯 해마다 4월이면 실시하는 당위적인 일이 된 느낌이다.


관행이라는 것. 교사로서, 참으로 두렵고도 민망한 단어다. 해마다 해왔다는 이유로 해야 하는 행사라면, 거기에 마음을 담고 열정을 쏟을 수 없다. 그저 상급 관청에 실시 여부를 보고하기 위해, 또, 주어진 예산을 집행하기 위한, 말 그대로 '영혼 없는' 행사일 뿐이다.

시나브로 냉소가 퍼지면
 

시나브로 힘을 잃어가는 진상규명 목소리를 아이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 서부원

 
국어사전엔 없는 정의이지만, 관행이라는 말에는 '영혼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적어도 학교 내에서 이뤄지는 관행적인 행사라면, 비교육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언컨대, 해묵은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교사들의 몸부림이야말로 교육개혁의 고갱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나부터 반성한다. 4월이면 교정은 노란 리본의 물결로 뒤덮이지만, 언제부턴가 기억하고 실천하겠다는 그날의 다짐은 흐릿해져만 갔다. 노란색만 봐도 울컥하던 마음도 어느새 무덤덤해지고, 4월 16일이 달력에 적힌 여느 기념일처럼 다가온다. 세월을 탓하는 건 비루한 짓일 테다.

해마다 같은 재료로 만드는데도 리본의 색깔마저 바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루가 지나 17일이 되면, 교정을 뒤덮은 노란 물결도 썰물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추모의 시한은 고작 하루이며, 다시 기억을 되살리려면 365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땐 또 성대하게 8주기 행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다고 진상규명이 될까요? 그저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될 수만 있어도 좋겠어요."

한 아이는 허송세월하며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는데, 앞으로라고 다르겠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학교 때부터 해마다 주도적으로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는 있지만, 바람이 해가 갈수록 소박해지더라는 거다. 언제부턴가 명절날 조상에게 제사를 모시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털어놨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아이들도 세월호 추모 행사를 이미 오랜 관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참사 뒤 두세 해까지만 해도 참가자 모두가 울먹이는 통에 행사를 진행하기조차 힘들었지만, 지금은 언뜻 행사를 위한 행사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슬픔과 분노가 다짐으로 승화되었지만, 이내 비정한 사회라는 벽에 막혀버린 탓이다.

추모 행사를 생략할 수는 없지만, 연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없다고 아이들은 선선히 말한다. 관행으로 여긴 채 한두 해 반복되다 보면 결국 냉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시나브로 냉소가 퍼지면 추모 행사의 의미는 퇴색되고 '피로감'을 언급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된다.

일부에서 "대체 언제까지 세월호를 우려먹을 거냐"는 식의 막말을 서슴지 않는 것도 냉소적 사회 분위기 탓이 크다. 막말을 막자면 그들의 인면수심을 나무라기보다 사람들이 냉소에 빠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법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짐승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2022년 4월 16일은 달라야
 

아이들이 만든 기억의 벽 곁에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뜻을 담은 티셔츠를 걸어놨다. ⓒ 서부원

 
특히 아이들의 냉소는 더더욱 위험하다. 공동체에 대한 불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수백 명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도 아무런 성찰과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라 느끼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불신은 기성세대에 대한 환멸을 불러오고, 끝내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올곧은 시민으로 성장하려면, '자기 효능감'을 경험하는 기회가 늘어나야 한다. 그들이 노력한 만큼 세상이 좋아지고 있음을 확신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정성을 들여 준비하는 추모 행사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힘이 된다는 걸 느끼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추모 행사를 열어 여전히 진상규명을 외치고 있지만, 기실 진상규명이 완수되어야 제대로 된 추모 행사를 할 수 있다. 늘 해왔으니 한다는 아이들의 풀이 죽은 목소리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도 절실하다. 내년 8주기에도 오늘과 똑같은 외침이 반복된다면, 아이들에게 참 면목 없는 일이 될 것이다.

등교 시간에도, 청소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교정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천 개의 바람 되어'가 울려 퍼지고 있다. 올해도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숙연함에 옷깃을 여미지만, 부디 내년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완수된 뒤 첫 번째 맞는 추모 행사이길 소망한다. 2022년 4월 16일은 올해와 달라야 한다.

바라건대, 내일도, 모레도, 글피에도 '잊지 않겠다'는 노란 세월호 현수막이 교문에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 같아선 유가족이 그만하면 됐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걸어두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4월 초면 붙였다, 17일이면 떼는 관행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사족.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글귀를 적어 매단 기억의 벽 곁에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지지한다는 뜻을 담은 티셔츠를 걸어놨더니, 지나가던 한 아이가 물었다. 세월호 참사와 지금의 미얀마 사태가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순간 추모 행사를 관행으로 여기고 있구나 싶었다. 그에게 건네지 못한 대답을 여기에 적는다.

"지금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행동하겠다는 다짐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별이 된 세월호 희생자들도 그것을 간절히 바랄 거라 확신한다."
#세월호 참사 7주기 #미얀마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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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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