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8 18:27최종 업데이트 21.04.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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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 할머니가 성노예 피해 사실을 최초 증언한 1991년 8월 14일 이후 30년 동안 한·일 양국에서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한국 대중 사이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공감대가 확산하면서 이것이 세계적 이슈로 발전해가는 이 기간에 양국의 정치적 주도 세력이 변화하는 중대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 6월 항쟁을 계기로 한층 강력해진 민주 진영이 1997년 이후 3차례 집권하면서 진보적 색깔을 상당 부분 띠게 됐다. 이들은 보수 진영과 정권을 주고받으며 사회 발전을 추동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93년에 자유민주당(자민당) 장기 집권이 붕괴한 뒤로 총리 6명이 일본신당·신생당·일본사회당·민주당에서 배출됐지만 그 뒤 자민당이 되살아나고 극우세력이 강해졌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집권당 정책으로 반영되고 있다. 모리·고이즈미·아소·아베·스가 내각은 20세기 자민당 정권들과 달리 극우적 성향을 농후하게 띠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14일 도쿄 한 호텔에서 열린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경쟁 후보들을 압도적인 표 차로 제치고 총재에 당선됐다. 사진은 14일 총재 경선이 끝난 뒤 스가 신임 자민당 총재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2020.9.14 ⓒ 연합뉴스

 
위와 같은 정치적 변화 중에서 일본 내의 변화에 주목해 이를 위안부 문제와 연관 짓는 학술 발표가 14일 오후 한국여성인권진흥원·동북아역사재단·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나왔다.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학 교수의 논문을 중점적으로 다룬 이 학술대회의 주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부정론 비판: 평화·인권·젠더 관점과 학문적 진실성'이다.

일본 제국의 문제
 
챌시 샌디 쉬이더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青山学院大学) 교수, 송연옥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교수, 윤명숙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장 직무대리,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과 함께 화상 발표에 나선 알렉시스 더든 교수가 위와 같은 일본 내 변화와 위안부 문제의 연관성을 비중 있게 설명했다.
 
'학문적 자유: 최고의 특권을 가지려면 학문적 진실성이 필요하다'는 제목으로 첫 번째 발표를 맡은 더든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를 '할머니(halmoni)'로 부르고 그 역사를 '할머니 역사'로 지칭하는 역사학자다.
 
뉴욕 코네티컷대학에서 동아시아 근현대사와 한국·일본 역사를 강의하는 더든 교수는 위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전에 램지어 논문의 문제점부터 비판했다. 그는 램지어가 한·일 두 나라 출신의 위안부, 특히 한국 위안부만 중점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 문제의 세계사적 의미를 퇴색시켰다고 평가했다.
 
제목이 '태평양전쟁에서의 성매매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인 램지어 논문의 서문에 "매춘업소에 대한 인적 충원을 위해, (일본 군부에 대해) 협조적인 업자들은 주로 일본과 한국의 여성들을 고용했다"는 문장이 있다. 위안부 문제를 한·일 문제로 축소하는 이 같은 서술을 더든 교수는 이렇게 비판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정말로 한국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국인 피해자만 있었던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한국인 피해자만 (주로)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논문이 잘못됐음을 보여줍니다. (중략) 피해는 전 세계에 퍼져 있었습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경쟁으로 편협하게 표현했습니다. 현재의 역사수정주의(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일본 극우의 관점)는 한·일 간의 갈등으로 모든 것을 축소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 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올해로 8번째 베를린 평화시위가 열렸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이자 활동가인 조혜미씨와 유학생 임다혜씨가 아름다운 손말로 시위에 모인 사람들의 손짓과 눈짓을 이끌어 냈다. 조혜미씨의 손말 시범에 따라 모두 "더 이상의 전쟁은 그만" "여성의 몸은 전쟁터가 아니다" "위안부 여성을 위한 정의" 라는 손말을 배웠다. ⓒ Eunae Anna Jo

 
위안부 문제가 양국 간의 현안으로 국한되면, 이 문제의 세계적 확산이 어렵다. 더든 교수는 그 같은 일본 극우의 의도를 드러내면서 이 문제는 '일본제국 전역'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일본군이 침략한 아시아 일대에서 전반적으로 벌어진 문제라고 강조한 것이다. '제국의 문제'이지 '한·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그의 메시지다.
 
논문에서 램지어는 위안부 동원의 주체가 민간인 업자들이었던 것처럼 서술했다. 이에 대해 더든 교수는 '민간이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로지 국가만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라고 강조했다. 위안부 강제동원의 규모나 광범위성만 보더라도 당연한 지적이다.

거품 경제 붕괴와 우경화
 
이렇게 램지어 논문을 비판한 뒤 위에 언급된 상호 연관성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일본 우경화가 한층 두드러진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표적 극우단체인 일본회의(닛폰카이기)가 1997년에 창립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1993년에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통해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인정한 것에 대한 극우세력의 반발이 일본회의의 창립으로 이어진 측면도 있다고 해석했다. 더든 교수는 "그것(고노 담화)이 1997년에 일본 우익의 일본회의가 창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며 "아베 신조가 일본회의의 지도적인 인물"이라고 언급한 뒤 이렇게 발언했다.
 
"일본회의는 특히 교육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젊은 일본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목표하에 만들어졌고, 군대가 위안부를 주도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극우 단체의 행렬. 영화 <주전장>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더든 교수는 극우세력이 엄연한 역사를 부정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 이후의 거품 경제(버블경제) 붕괴와도 관련이 있다고 언급했다. 자산의 명목가치가 실제 가치를 훨씬 초과하는 현상이 누적되다가 발생한 거품 경제 붕괴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희석하고자 역사 문제를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의 경제 침체가 불거지면서 국내 문제에서 국민들의 눈을 돌리고 일본인이라는 자부심을 고취하려고 우익들이 의도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역사를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 제기로 일본의 위상이 깎이는 측면도 있지만 극우세력의 활동 공간이 넓어지는 측면도 있음을 강조한 설명이다. 위안부 문제의 세계적 이슈화로 인해 일본의 전쟁 범죄가 부각되고 일본 국민들의 자긍심이 약화하는 틈을 타서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고 대중의 환심을 사려는 극우 세력의 접근법을 비판하는 지적이다.
 
탈냉전 후 다른 길 걸은 한국과 일본

타당성을 갖는 이 설명에는 약간의 보충이 필요하다. 1990년대 이후로 일본에서 발생한 거대한 정치적 변화는 위안부 문제 때문에 파생된 측면도 당연히 있지만, 크게 보면 1990년을 전후해 두드러진 세계적 탈냉전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여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한·일 양국에서도 전통적인 정치체제가 동요했다. 한국에서는 군부 정권이 1987년 6월항쟁 때 '6·29 항복 선언(직선제 수용)'을 했고, 일본에서는 1955년 이래의 자민당 장기 집권이 1993년에 붕괴했다. 거품경제와 함께 자민당 장기 집권도 붕괴한 것이다. 이런 변화에 대한 대응의 차원에서 두드러진 것이 극우세력의 결집이다.
 
탈냉전이 극우세력의 도약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일본회의의 설립 취지문에도 나타난다. 1997년 5월 1일 창립대회 당시 1000여 명의 학계·종교계·재계·정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낭독된 '설립 선언'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었다. 교도통신 기자 및 서울 특파원 등을 지낸 아오키 오사무의 저서 <일본회의의 정체>에 인용된 부분이다.
 
아울러 냉전 구조가 붕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오류는 철저히 폭로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는 각국이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혼돈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본에서는 이 격동의 국제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확고한 이념과 국가 목표가 없다. 이대로 무위도식한다면 망국의 위기가 소리 없이 닥쳐오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탈냉전을 계기로 한·일 양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는 민주·진보 진영의 역량이 지속적으로 상승한 데 반해 일본에서는 과도기를 거쳐 자민당이 살아난 뒤 극우파가 자민당과 국가를 장악했다. 일본에서 탈냉전 이후의 '새로운 혼돈의 시대'를 '무위도식'하지 않고 가장 잘 활용(정확히 표현하면 '악용')한 것은 극우세력이었던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16일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자신을 예방한 토니 블링컨(오른쪽) 미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왼쪽) 국방장관을 영접하고 있다. 2021.3.16 ⓒ 연합뉴스

 
한국에서 대중의 정치적 역량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한미동맹이 약해진 것과 일본에서 대중의 역량이 크게 발전하지 않고 미일동맹이 오히려 강해진 것이 이런 차이를 낳은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민주·진보 진영의 활동 공간이 넓어진 데 비해 일본에서는 극우파와 미일동맹의 결합이 사회 진보를 막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탈냉전이 사회 진보로 이어진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그런 배경에서 정치적 반동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일본 극우세력은 기존의 교과서 문제보다는 위안부 문제나 영토 문제 등을 더욱 부각하며 대중 동원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매개로 극우세력은 자국이 가해자가 아니라 '애매한 소리를 듣는 피해자'라는 점을 부각하려 하고 있다. 더든 교수의 설명처럼 이 문제를 국민통합의 매개체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본 우경화 현상과 위안부 문제의 상호 연관성에 대한 알렉시스 더든 교수의 설명은 보충할 측면도 있지만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국에 반격을 가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움직임을 제3자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청할 만한 발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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