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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멍에 이은 '들판멍'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

봄바람 따라 사뿐사뿐, 경남 하동 슬로시티 토지길

등록 2021.04.10 12:56수정 2021.04.1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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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 슬로시티 토지길 평사리 들판 ⓒ 정지인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버스가 하동으로 이어지는 19번 국도를 달린다. 창밖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지리산 자락 옹기종기 모인 집들의 반대편엔 햇빛을 받은 섬진강이 반짝반짝 흐른다. 넉넉하고 평화로운 강물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오늘의 여행지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도착했다. 

작년 이맘때,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신종감염병으로 전국이 발칵 뒤집힌 직후라서 그런지 인적 드문 시골길은 적막감이 들 정도였다. 호기심이 생겨 동네를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길이 바로 '토지길'이었다. 토지길은 악양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코스로, 평사리 들판과 악양천변, 지리산 자락 산골 마을, 박경리 소설 <토지>의 실제 배경이 된 '조부자집'과 최참판댁까지 아우르는 길이다. 그때 제대로 걸어보지 못해서 못내 아쉬웠는데, 이번에 다시 찾은 것이다. 


오래 걸어도 질리지 않는 '느리게 걷기'의 미학 

토지길 도보여행의 출발지는 악양면사무소가 있는 작은 동네의 마을 숲 '취간림'이다. '물가에 푸른 숲'이라는 뜻을 가진 인공 숲은 마을을 보호하고 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됐다. 취간림 옆으로는 악양천이 흐르고 있다. 3월의 화창한 봄날, 활짝 핀 매화꽃과 지리산 자락 맑은 공기를 친구 삼아 걷다 보면 마치 길을 전세라도 낸 듯 상쾌한 기분이 든다. 

악양은 국내에 몇 안 되는 슬로시티(Slow City)기도 하다. 슬로시티는 느림과 상생의 가치로 지속가능한 도시를 추구하는 국제운동이다. 예로부터 녹차와 대봉감, 매실 등 전통 먹거리를 생산해온 악양은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을 배경으로 자연과 문학이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로 인정받아 2009년 국내에서는 다섯 번째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데, 획일적인 발전모델을 거부하고 비전을 모색하는 악양마을의 노력이 돋보인다.

토지길은 부계마을을 시작으로 아기자기한 산골마을로 이어진다. 토지길 도보여행의 큰 매력은 시골 정취 가득한 골목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구불구불 정겹게 휘어진 골목길을 걷다보면 집안이 훤히 보이는 낮은 담장에 금새 마음이 푸근해진다. 집집마다 주인의 얼굴을 그려놓은 문패에서도 정이 뚝뚝 묻어난다. 집 마당에 피어난 봄꽃은 낮은 담장과 어우러져 골목길을 꽃길로 만드니 일석이조다.

길은 다시 정서마을에서 아름다운 산 중턱의 과수원길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 되었다는 '조부자집'의 조씨고가(화사별서)를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토지길의 가장 하이라이트 구간으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매화꽃이 하얗게 피어난 담장 너머 지리산 자락을 포근히 감싸는 풍경이 평화롭다. 잠시 발길을 멈춰 뻥 뚫린 하늘과 지리산 기슭에 자란 푸릇푸릇한 밭작물들을 바라보니 절로 마음이 착해지는 기분이 든다.  
 

최첨판댁 풍경. 처마에 달린 옥수수가 정겹다 ⓒ 정지인

 

최첨판댁 뒤뜰 풍경 ⓒ 정지인


평사리 너른 들판 바라보며 멍때리기 


입석마을에서 평사리로 넘어가는 코스는 지리산둘레길과 길이 겹친다. 두어 번 둘레길 표지판과 마주하며 구례와 하동, 산청, 남원을 잇는 커다란 지리산 구석구석 얼마나 많은 길과 마을, 삶이 배어 있을까 생각이 머문다. 다음엔 지리산둘레길을 걸어보겠노라 다짐하며 평사리로 발길을 재촉한다. 

토지길 도보여행 마지막 코스인 최참판댁 부근에 다다르면 관광지 분위기가 난다. 사람들과 상점이 있으니 활기가 느껴진다. 긴 도보여행에 끼니를 해결하며 쉬어갈 수 있으니 여행자에게 고마운 상권이기도 하다. 식사로 원기를 보충했으면 최참판댁과 박경리문학관을 둘러볼 차례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를 재현해 놓은 최참판댁에서는 작가의 문학세계에 잠겨보는 것도 좋고, 봄꽃이 어우러진 한옥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 놀이를 즐겨도 좋다. 알록달록 처마에 달린 옥수수와 뒤뜰에 놓인 장독대마저 운치가 있다.

최참판댁에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바로 평사리 들판 조망이다. 평사리 뷰포인트는 최참판댁보다는 옆에 있는 박경리문학관 마당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고고하게 서 있는 부부송과 섬진강 물줄기가 너른 들판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여유롭게 앉아 멍하니 바라보는 느낌이 참 좋다. '평사리 들판 멍'은 토지길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다. 

하동 토지길은 봄꽃들이 수놓는 3~4월이나 대봉감이 익어가는 가을이 여행하기 좋다. 화개버스터미널에서 평사리와 악양면사무소를 오가는 군내 버스를 이용하면 대중교통으로도 다녀올 수 있다. 

▶︎ 지금 소개한 여행지를 영상으로 보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홀가분지인여행'을 검색하세요!
 

매화꽃 활짝 핀 지리산 산골마을, 슬로시티 토지길(경남 하동) ⓒ 정지인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정지인님은 여행카페 운영자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2021년 4월호에 실렸습니다.

#평사리 #하동악양 #하동슬로시티 #토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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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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