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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당했던 여성들... 미국 최초의 여성병원에서 벌어진 일

[책줍일기] 의학사학자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지음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등록 2021.04.09 18:15수정 2021.04.0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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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그 의자에 처음 앉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바지를 벗고, 병원에서 준 헐렁한 고무줄 치마만 입은 채 발 받침대에 양쪽 다리를 올려놓고 앉아 가만히 진료를 받고 있으려니, 민망함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진찰 도구의 촉감도 유난히 차갑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산부인과 진료대를 두고 '굴욕 의자'라고 표현하는 건 분명 잘못됐지만, 왜 그런 말이 나오게 됐는지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산부인과 진료대 ⓒ elements.envato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왜 산부인과에서의 경험이 유독 그런 기억을 남긴 것일까. 무엇보다 산부인과가 이비인후과나 안과, 치과처럼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는 데서 비롯된 두려움도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존중 받지 못한다'는 느낌도 한몫했다. 

물론 의사는 하루에도 수많은 환자들을 만날테고, 진료는 그가 하는 상시적인 업무 중 하나이니, 특별한 배려나 사려 깊음을 기대할 순 없다. 다만, 그가 여전히 누군가에겐 산부인과라는 곳이 문턱 높은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환자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의료적인 과정들을 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덴 한계가 있다는 점을 기억했다면 그날의 기억은 좀 다르게 남았을 것이다. 


단순히 의료진이 감정노동을 더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환자의 현재 상태나 의료적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환자가 자신의 몸과 질병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근거 없는 두려움이나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이처럼 환자와 의사가 제대로 관계 맺고 소통하는 건 무척 중요한 과정이고, 그렇기에 쉽게 생략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것이 지금의 '상식'이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러한 '상식'을 기대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환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진료가 벌어지고, 환자가 의사와 동등한 한 명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실험체'처럼 여겨지는 그런 시절 말이다. 지금은 쉽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성병원의 역사 속에서도 이런 흔적은 발견된다. 

우리가 몰랐던 산부인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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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역사 ⓒ 갈라파고스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은 바로 그러한 흔적을 추적한 책이다. 책은 미국 부인과 의학이 발전하게 된 역사를 짚으면서, 그 과정에서 절대 빼놓고 언급할 수 없는 존재들을 조명한다. 바로 흑인 노예 여성들이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초창기 미국 여성병원은 흑인 여성 노예들에게 그야말로 '치유'인 동시에 '억압'의 장이었다. 

1800년대, 노예주들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노예들의 생식 건강이었다. 1808년, 미국 의회가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 수입을 금지하면서, 노예주들은 자국 내에서 태어나는 노예들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욕망은 당시만 해도 유럽에 비해 뒤처져 있던 부인과 의학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미국 남부 의료진들의 욕망과 연결된다. 여성 질병을 앓아 자녀를 출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노예들을 '소유한' 노예주가 의료진에게 도움을 요구하면, 의료진이 '실험'이나 다름없는 치료를 진행하는 관행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의료진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제임스 매리언 심스였다. 심스는 앨라배마주 마운트 메이그스의 작은 노예 농장에 병원을 세웠는데, 이 병원은 미국 최초의 여성병원으로 기록된다.

1840년대, 제임스 매리언 심스는 누공(방광과 질 사이에 연결구멍이 생겨 소변이 질을 통해 누출되는 상태. - 출처 의학용어사전) 치료차 이곳을 찾은 루시, 애너카, 뱃시라는 흑인 노예 여성 세 명을 5년간 '대여'한다. 그리고 다른 의사들과 '5년 동안 이어질 누공 실험을 관찰'할 권리를 주겠다는 계약까지 맺는다. 

물론 세 명의 여성들은 자신이 주인에게서 심스에게로 '대여'됐다는 사실, 심지어는 자신이 수술을 받는 과정이 지역 백인 주민들에게 공개되는 하나의 '행사'가 될 것이라는 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처럼 심스와 의료진들은 당사자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정확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채 이들에게 일방적인 '실험'을 진행한다. 

여러 흑인 여성 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비슷한 형태의 '실험'을 통해, 심스는 여러 저술을 남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체위나 방광-질 누공 수술법, 수술 기구 등을 개발한다. 미국 부인과 의학은 심스를 비롯한 여러 의료진들이 남긴 '실험'의 토대 위에서 발전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흑인 노예 여성들의 존재, 그들의 고통과 희생은 제대로 기억되지 못했다. 

심스 또한 흑인 노예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진 않았으나 삽화 등에서 흑인 여성을 백인 여성으로 바꿔 그렸다. 또, 환자가 누공 수술에서 겪은 아픔을 감추며, '흑인들은 괴로움이나 고통을 잘 참는다'는 당대의 편견을 재반복해 기술하기도 했다. 

이처럼, 흑인 노예 여성들은 때론 치료를 빙자한 실험을 당하며 죽어나가거나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미국 부인과 의학의 발전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지키는 '수혜'를 입은 이들도 존재했지만, 이는 결국 노예제 영속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료계의 반인권적인 태도는 흑인과 마찬가지로 '백인성'이 없는, 사실상 '비인간'으로 취급받았던 아일랜드 여성 이주민을 치료할 때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은 노예제와 자본주의, 의학계의 기묘한 연결 관계, 그리고 그 결과를 단순하고 일방적인 방식으로만 설명하진 않는다. 이 책은 이와 같은 한계와 문제점을 정확히 직시하되, 이 구조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던 흑인 노예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고 조명한다. 환자로 여성병원에 갔다가, 간호사로 성장하게 된 흑인 노예 여성들의 사례를 소개하는 부분 등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노예주나 의료진에 의해 재생산권을 통제받으면서도, 이에 대항했던 흑인 노예 여성들을 조명하며, 이것이 노예 해방의 신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기도 한다. 흑인 노예 여성들을 그저 '불쌍한 피해자'의 자리에 가두지 않고, 입체적 존재로 그리려는 필자의 성실한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독립적으로 애정 관계를 '선택'하는 것, 계획 임신을 하고 모성애를 강조하는 것 등이 흑인 노예 여성들이 직면한 억압, 차별, 편견에 대한 하나의 대응 방식이 됐다는 부분은 특히나 흥미롭다. 
 
"여성 노예들은 숙고와 계획, 노련함을 조합해 노예라는 개념, 즉 재생산에 관해 아무런 힘이 없는 동산에 불과한 존재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다. 노예 여성들은 직접 계획한 조건에 맞추어 아기를 낳기 위해 가족의 해체, 심지어는 폭력의 위협까지 무릎썼다. 또한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의학 분야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져 나갔다.
... 흑인 노예 여성들은 의사와 노예주들의 육체적 처벌과 앙갚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임신을 계획하고 피하며, 자신이 사랑하기로 선택한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의학적 지식을 물려주었다. ... 또 아플 때면 쇠약한 몸과 상처 입은 정신을 의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흑인들의 신체가 더 강하다는 해로운 관념과 서사에 대한 대응으로 자신들의 연약함을 드러냈다." (p.140~143)

"매리언 심스는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미국 산부인과학의 아버지'로 불리기까지 했던 제임스 매리언 심스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꽤 많이 달라졌다. 그의 '명성'을 소개하는 문구 뒤에는, 흑인 노예 여성들의 고통과 희생이 바탕이 됐다는 사실이 빠지지 않는다. 아무리 중요한 업적을 세웠다 한들, 그것이 누군가의 생명과 인권을 딛고 이룬 성취라면 박수를 보낼 수 없다는 게 상식이 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증명하듯, 뉴욕 센트럴파크 한복판엔 세워져 있던 그의 동상은 지난 2018년 철거됐다. 당시, 철거를 요구해왔던 활동가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매리언 심스는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

새로운 상식이 만들어지고, 그 상식에 따라 과거의 업적과 영웅을 다시 평가해야 하는 시대다. 여성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공간인 여성병원의 숨겨진 역사를 들춰낸 이 책은, 그래서 더더욱 반갑다. 이 복잡한 흐름을 직시하며 여성병원을 치유, 더 나아가 '진보의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의 추천의 말 일부를 옮긴다. 
 
"... 여성을 '위한다'는 선의에 압도당해 여성의 삶이 아니라 질병만 보게 된 것이 아닌지, 이제는 의료인도 여성도 함께, 길고 다시 질문해야 할 때이다.  ... 선조 여성들의 피와 눈물이 스민 과학 발전의 산물을 어떻게 민주적이고 여성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해야 한다." (p. 258~259)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 왜 여성들은 산부인과가 불편한가?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 (지은이), 이영래 (옮긴이), 윤정원 (감수),
갈라파고스, 2021


#책줍일기 #치유와억압의집여성병원의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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