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펼 것인가, 접을 것인가

[주장] 나눔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다

등록 2021.03.25 10:15수정 2021.03.25 10:15
0
원고료로 응원
자유와 평등,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실현 가능한 것일까. 

남편이 친구의 시댁 농장에 땅을 빌려 농작물을 가꾸고 있다. 나도 덩달아 가끔씩 간다. 그런데 느긋하게 흘러가는 시골 풍경과는 달리 마음이 편치 않다. '이 농장은 내 것이 아니라 친구의 시댁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고 서로 나누고 공유하며 살고 싶은 것은 로망일 뿐이었다. 물질적 토대가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사람들은 어떤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과연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우리가 꿈꾸는 것만큼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에서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비와 우산'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이다. 신영복 선생님이 복역하기 시작한 30대 초반의 일이다. 교도소에 20대 중반쯤 된 젊은 신입자가 들어왔다. 모두들 수의를 벗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잠자리에 누울 때, 그는 수의를 입은 채로 누웠다. 옆자리 어떤 사람이 한 번 세탁한 러닝셔츠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거절했다. 아침 세면 시간에 치약이 없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치약을 주었다. 또 거절했다.

신영복 선생님은 쓰던 걸 주어서 그런가 싶어, 새것을 구입해서 남들 안보는 데서 치약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저만큼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조차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쳤다. 민망하게시리.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
"전에 저 주려고 구입한 치약 아직도 있습니까?" 묻더란다. 달라는 말이 고맙기까지 해서 얼른 주었다. 나중에 러닝셔츠도 치약도 받지 않으려 했던 이유를 물어보았다. 러닝셔츠가 없어도, 치약이 없어도 떳떳한 게 차라리 낫다고 했다. 러닝셔츠를 받고 치약을 받으면 꿀린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신영복 선생님은 "돕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 처지가 같지 않고,
그 정이 같지 않은 사람의 동정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담론>291쪽
그 처지가 같지 않고, 그 정이 같지 않은 사람의 도움은 물질적으론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동정받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확인시킨다. 도움을 받을 때조차 꿀린다는 느낌이 든다니! 호의를 베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꿀린다는 마음은 호의를 베푸는 사람과 호의를 받는 사람의 입장 차이로 생기는 것이리라. 그 입장 차이는 위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것을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돕는다는 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담론>287쪽

그렇다면 사회적 나눔이라는 이름의 시혜와 자선, 기부와 증여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인가. 일부 부자들은 국민의 의무로서 당연히 내야 하는 세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기부나 자선, 시혜에 있어서는 적어도 세금보다는 적극적이다. 찬사와 권력의 맛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은 나눔의 문제는 인정이나 동정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눔이 자선과 기부와 증여와 같은 것도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자본주의 자산가들이 그처럼 회피하는 세금을 통해서 가능한 것인가. 세금 징수를 통하여 복지 국가를 이룩한다면 나눔의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될까. 이에 대해 신영복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나눔의 문제는 ...
후기 근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복지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담론>294쪽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는 개인의 소유가 인정되는 곳이다. 어떤 사람은 많이 소유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적게 소유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많이 가진 자는 자선과 기부를 통해서든 세금을 통해서든 권력 구조의 상부에 위치한다. 반대로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리 좋은 복지 시스템 속에서도 권력의 하부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그 청년의 말대로 꿀리는 삶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자체에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럼 어떻게 지구라는 곳의 한정된 자원을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느 누구도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가지지 않고 평등한 삶을 구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신영복 선생님의 답변이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담론>287쪽

신영복 선생님의 '돕는다'는 의미는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란다. 자선이나 기부를 통해 시혜를 베푸는 것도 아니다. 세금을 통해 복지국가를 이룩하는 것도 아니다. 자선, 기부, 세금, 복지 등은 우산을 들어주는 행위다. 그럼 '함께 비를 맞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빌어오자면 그 처지와 그 정이 같아지는 것이다. 우산을 접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권력 구조를 양산하기 때문에 그 시스템 하에서는 그 처지와 그 정이 같아질 수 없다. 고로 우산을 접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사유재산 제도를 접는 것을 말한다.

지구 상에 '내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생명체가 지구에 존재하다 사라졌다. '나'도 그중 하나다. 그야말로 '나'는 찰나적인 존재다. 그런 '나'가 이 지구의 어떤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 것'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상하지 않은가. 잠시 왔다가는 존재요, 잠시 그 자원을 빌려 쓰는 주제에 말이다.

지구 상의 물질에 대해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소외시키는 행위이다. 일단 '내 것'이 되면 다른 사람은 그것을 쓸 자유를 빼앗긴다. 사용하기 위해서는 '나'의 허락을 받고 일정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물건의 소유는 이처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요, 권력을 행사하는 원천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개인 간의 싸움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사유재산 제도가 존속하는 한, 권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곳에 우리가 그처럼 고귀하게 여기는 자유와 평등이 들어설 여지가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잘 갈 수 있으리라 믿어왔다. 하지만 조금만 솔직해지자. 자본주의가 흥하면 흥할수록 자유와 평등은 억압된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멈춰야 하는데. 폭주하는 자본주의를 누가 멈추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유와 평등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까지 '내 것'이 아닌 것들이 있다는 것이. 햇빛, 공기, 바람, 구름, 새소리, 꽃향기...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크기도 커지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우산을 펼 것인가, 접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 그 처지와 정이 같아진다. 다시말해 자유와 평등을 나누는 동료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자본주의 #자유 #평등 #나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