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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 서훈서 차별받는 2차 동학농민 참여자들

[주장] 농민의병도 양반의병만큼 애국자... 보훈처, 서훈대상 개정위 만들어 살펴봐야

등록 2021.03.25 11:24수정 2021.03.2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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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9일 청와대에서 국가보훈처장에 대한 임명장 수여식이 있을 때,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문재인 대통령께 "독립유공자 등을 많이 발굴하고 그 분들이 어려움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보훈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정책 분야다. 애국심의 원천 같은 것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국가가 책임진다는 믿음이 있도록 보상체제를 갖춰야 한다"('국가보훈처장 임명장 수여식 관련 서면브리핑' 중)고 당부했다. 마침 올해 5월 11일은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 3주년이 되는 날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 보훈처가 다시 살펴야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1895년 2월 27일)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전봉준 사진을 발굴 공개함 ⓒ 양상현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이 "독립유공자 등을 많이 발굴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하나, 보훈처장은 평생을 해군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보훈의 세 영역(독립, 호국, 민주) 가운데 독립 보훈에 대해 높은 식견이 있는지가 필자는 궁금하다.

필자는 지난 2년 동안 주장해왔다.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순국한 을미의병(1895) 참여자에 대해 독립유공 포상을 했듯이, 똑같이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순국한 2차 동학농민혁명(1894) 참여자들에 대해서도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 포상을 하는 게 맞다고 말이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공훈발굴과는 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아 왔다.

이에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 서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니, 황기철 국가보훈처장께서 문제를 직접 살펴보기를 바란다.

[관련 기사]
전봉준·최시형 독립유공 서훈, 농민이라 안 되는 겁니까? http://omn.kr/1oep3
국가보훈처, 2차 동학농민운동의 서훈 문제 조속히 마무리하라 http://omn.kr/1pg20

독립 보훈, 동일한 기준 적용해야 하는데...


나라를 위해 순국한 분들에 대해서는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독립 보훈에서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고 있지 않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과거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에 맞서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을미의병에만 참여한 분들 가운데 독립유공이 있는 120명을 1962년~2020년까지 서훈하였다. 대단히 잘한 일이었다.

필자가 파악한 바, 대통령 표창에 4명, 건국포장에 36명, 애족장에 35명, 애국장에 34명, 독립장에 10명, 대통령장에 1명이 서훈을 받았다(독립유공 서훈에 대한 상세 내역은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정보 창에 들어가면 누구나가 확인할 수 있다. 공훈에 대한 구체 내역은 '공훈록'을 통해 확인하기를 바란다).

침략자 일본군이 1895년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비를 시해하며 친일정권을 세우고, 그 친일 정권이 단발령을 공포한 것에 맞서 항거한 을미의병 참여자로 서훈을 받은 분들의 '공적개요'는 다음과 같다. 애국선열들이 얼마나 훌륭한 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공훈전자사료관'에 나온 독립유공자의 '공적개요'를 그대로 소개한 것이다.

먼저 대통령 표창을 받은 4분의 공적개요이다.

1. 김진림(1838∼1900, 63세): "1896년 경북 안동군에서 권세연이 이끄는 안동의진 내방장으로 활동함."(2018, 대통령표창)
2. 윤병의(1822∼1899, 78세): "1896년 충북 충주군에서 유인석과 뜻을 같이하고 시책(時策,주책)을 개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함."(2018, 대통령표창)
3. 이강하(1873∼1940, 68세): "이기찬 의병장의 아들로, 1896년 의병운동에 참여하여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상주감옥에 수감됨."(2018, 대통령표창)
4. 박주대(1836∼1912, 77세): "1896년 1월 전기 의병이 경북 전역으로 확산될 때 경북 예천에서 예천 의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한 후 동생 박주학을 대신 보내 의병부장의 직을 맡게 하였고, 항일지사들의 문서를 정리한 나암수록을 저술한 사실이 확인됨."(2005, 대통령표창)
 

다음은 건국포장을 받은 36명의 공적개요 가운데 그 일부이다. 국가보훈처는 2020년 2명, 2018년 1명, 2011년 2명, 2009년 1명을 서훈하였다.

1. 이면수(1833∼1898, 66세): "1896년 1월경 강원 춘천군에서 이소응 등이 의병을 일으킬 때 통문을 돌려 독려하고 이소응 의진에서 군사장으로 활동함."(2020, 건국포장)
2. 류인목(1839∼1900, 62세): "1896년 경북 지례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을 돌리고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여중룡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이기찬 의진과 합진하여 군문집례로 활동하다 체포됨."(2020, 건국포장)
3. 최은동(1866∼1936, 71세): "1895년 11월 충남 공주 등지에서 문석봉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문석봉·오형덕 등과 함께 탈출하는 등 활동함."(2018, 건국포장)
4. 이빈호(1861∼1930, 70세): "1896년 2월 20일경 결성된 2차 선성의진의 참모로서 동년 3월 경북 태봉전투에 참가한 사실이 확인됨."(2011, 건국포장)
5. 권옥연(1839∼1900, 62세): "1895년 경북에서 안동의병 권세연 의진에서 소모장으로 활동하고, 1896년 안동의병 김도화 의진에서 중군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2011, 건국포장)
6. 황재현(1868∼1903, 36세): "1896년 충남 남포에서 이세영 등과 의병을 일으킨 사실이 확인됨."(2009, 건국포장)


다음은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 진영에서 순국한 분들이다. 1894년 7월 23일 침략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고종을 볼모로 잡았으며, 조선군을 무장 해제하였으며, 친일 정권을 세웠다. 이에 같은 해 10월에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봉준·최시형이 재차 봉기하였고, 함께 참여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의해 총살·사살·화형·작두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지금까지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해서 단 한명도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전봉준과 최시형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은 아래와 같다.

전봉준(1855∼1895, 41세) :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여, 1894년 10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공주·원평·태인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일본군에 맞서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1895년 4월 24일 의금부 전옥서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2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총사령관이었다.'

최시형(1827∼1898, 72세)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을 듣고, 항일전에 나서고자 충북 옥천 청산에서 동학 북접 간부회의를 소집했고, 1894년 10월 16일에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총기포령을 내렸다. 그는 손병희를 통령에 임명하고, 손병희에게 통령기를 주어 항일 전선에 나서게 했다. 그와 손병희가 동학농민군을 지휘하여 충북 영동군의 '용산', 충북 보은의 '북실(종곡)', 충주 외서촌의 '되자니'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1898년 4월 6일 관군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21일 고등재판소 감옥서 교형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였다.'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전봉준 장군 모습 ⓒ 박용규

 
다음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산하 기관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19년에 발간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 안내> 책자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홈페이지의 참여자 명단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만 그대로 뽑아 소개한 것이다.

1. 가병인(1866, 3, 10∼1894, 12, 30. 29세) : "문장준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해 9월 10월 태안, 서산, 해미전투와 홍주성 전투에 참여 후 태안 백화산에서 도피 중 일본군에게 총살됨"

2. 김재황(1866∼1894, 12. 29세) : "장흥 옥산성과 석대전투에 참전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생포되어 처형됨"

3. 김춘필(1859∼1895, 3, 16. 37세) : "동학접주로 1894년 9월 삼례봉기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남덕유산 영각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중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됨"

4. 박기옥(1848∼1894, 12, 12. 47세) : "동학접주로서 무안지역 전투 이후 현경면 평산리에 은신 중에 마을 사람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됨"

5. 박제억(1858∼1894, 11, 16. 37세) : "1894년 공주 우금치전투에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으며, 공수원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공주 시내 정주뱅이에서 11월 화형당함"

6. 박종지(1856, 3, 3.∼1894, 12, 27. 39세) : "이인환 대접주 기포령에 따라 1894년 12월 장흥, 강진일대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장흥 석대전투 패한 후 일본군에 의해 12월 처형당함"

7. 서주흠(1863∼1894, 12, 8. 32세): "동생 서길흠과 함께 1894년경 광양현 지역에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백운산 동굴로 피신하였으나 발각되어 일본군에게 총살당함"

8. 송원환(1853, 5, 20.∼1895, 1, 11. 43세): "전북 부안의 동학접주로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으며, 1895년 1월 11일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함"

9. 신경일(1861, 8, 14.∼1894, 11, 17. 34세): "1894년 장수지역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였으며, 야간에 담배 밭 밑에 숨어있다 일본인에게 발각되어 장계 소재지 장터에서 화형 당함"

10. 양태인(1855, 9, 16.∼1894, 11, 9. 40세): "동학농민혁명 당시 우금티의 동학농민군에게 밥을 날랐으며,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함"


2차 동학농민혁명 과정서 사망한 사람만 약 120명

필자가 파악한 바,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 사살, 작두형, 화형을 당해 서거한 순국자가 111명이었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일본군과 싸운 뒤에 체포되어 총살을 당한 순국자가 6명이었으며,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자결한 순국자가 2명으로 총 119명의 순국자가 확인되었다.(박용규,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 인간과자연사, 2021, 99∼130쪽).

지금까지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순국한 분은 대통령 표창, 건국포장, 애족장, 애국장, 독립장, 대통령장 가운데 단 한명도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분이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있었던 3·1절 기념사에서 "정부는 그동안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을 개선해 역대 최고 수준으로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해왔다. 공적심사 기준을 더욱 개선해 포상 대상을 확대해 나가겠다"라고 연설했다. 훌륭한 말씀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을 확대하는 조치를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작년에 필자는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에 여러 번 민원도 보내고, 담당 공무원도 여러 차례 만나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도 독립유공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서훈대상 개정위원회'를 만들어 서훈 조치를 할 것을 요청하였다.

앞서 문 대통령과 만난 황기철 국가보훈처장께서 "독립유공자 등을 많이 발굴하겠다"고 말한 것을 필자는 기쁘게 생각한다.

황 보훈처장이 갑오의병(1894년 8월)과 을미의병(1895)이 독립유공 서훈대상에 들어가 있는지를 공훈발굴과 과장으로부터 보고 받았는지 묻고 싶다. 1895년 을미의병 참여만으로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분이 120명에 달한다는 보고를 받았는지 묻고 싶다. 갑오의병과 을미의병 사이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일어난 2차 동학농민혁명(1894년 9월)만 서훈대상에서 누락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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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1월29일 오후 청와대에서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만약 이와 같은 보고를 받지 못하였다면, 국가보훈처장께서는 이남우 차장, 독립유공 공적심사위원장과 함께 나서서 그 진상을 규명하여 주기를 바란다.

양반출신 의병만 애국자인가. 항일 농민 전봉준은 애국자가 아닌가. 전봉준의 나라 사랑이 의병 참여자들의 그것에 비하여 뒤지는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은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에서 포문을 열었다. 이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고 통설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 등 의병 참여자 2682명에게 서훈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갑오의병과 함께 독립운동의 포문을 연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게는 단 한명도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천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국가보훈처는 의병 참여자와 동일하게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게도 같은 잣대를 대야 한다. 국가보훈처장은 '독립유공 서훈대상 개정위원회'를 만들어, 이 문제를 즉각 마무리하기를 바란다.
#2차 동학농민혁명 #독립유공 서훈 #전봉준 #국가보훈처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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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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