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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혐의로 수감된 남자, 그가 자유라고 주장한 까닭

[리뷰] 영화 <모리타니안> 믿음과 신념으로 지켜내는 정의

21.03.24 14:26최종업데이트21.03.2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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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리타니안> 포스터 ⓒ (주)디스테이션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변호사 '낸시'(조디 포스터)는 프로 보노(pro bono, 변호사를 선임할 여유가 없는 개인 혹은 단체에 대해 보수를 받지 않고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활동의 일환으로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리타니아 출신 '슬라히(타하르 라힘)'의 변호를 맡는다. 미국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라는 혐의를 받은 그는 기소와 재판 없이 6년 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이어 왔다.

그를 접견한 후 그의 무죄를 주장하기로 결정한 낸시는 동료 '테리(쉐일린 우들리)'와 그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 나서지만, 진실을 가로막은 국가 기밀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한편 그의 유죄를 확신하던 군 검찰관 '코우치(베네딕트 컴버배치)' 중령은 재판 준비를 하면 할수록 아무리 봐도 부족한 증거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쿠바에 위치한 관타나모 수용소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과 같은 테러리스트는 물론 단지 테러와 연관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은 민간인들까지 납치, 감금한 후 고문을 행한 것으로 악명 높다.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자랑으로 삼는 미국의 수치이기도 하다. 이 장소가 논란이 된 근본적인 이유는 변호인 선임권, 묵비권, 재판받을 권리 및 신체 자유와 같은 개인권의 말살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에서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믿어졌던 원칙이 복수심과 원한 앞에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흑역사인 것이다. 이곳에 무고하게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모리타니안>은 이 흑역사를 두 가지 관점에서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플롯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하나는 살라히의 과거와 낸시, 코우치 중령의 현재를 연결시키며 인권이 무참히 짓밟힌 상황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과정을 조명한다. 다른 하나는 낸시와 코우치 중령이 펼치는 법정 공방을 각각 공적 맥락과 사적 맥락에서 비추며 정의의 양면성을 논한다. 

이때 전자는 한 개인의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 그들의 종교성을 선택한다. 살라히는 신에게 모든 것을 위탁한다. 유일하게 마음 편히 말을 섞을 수 있었던 옆방 수감자가 죽자 서아프리카의 독실한 이슬람 국가 모리타니아에서 온 슬라히는 신에게 매달린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정당한 삶을 달라고, 관타나모에서 억울하게 죽은 수감자들에게 평화를 달라고 기도한다.

반면에 낸시는 철저히 변호사의 윤리와 원칙에 스스로를 의탁한다. 그녀는 살라히가 고문으로 인해 허위 자백서를 작성한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며 변호를 포기한 동료 테리와 달리, 그녀는 자신이 믿는 원칙과 신념을 다시 한번 붙잡는다. 낸시는 모든 사람에게 사법 정의는 적용되어야 한다면서 다시 한번 슬라히를 접견하고 그에게 진실을 말할, 정의를 바로잡을 기회를 준다. 

코우치 중령은 두 사람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달리 말해 살라히의 신에 대한 믿음과 낸시의 사법 정신에 대한 신념의 접점이다. 그는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의 남쪽 타워를 들이받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친구를 잃었다. 그래서 그는 살라히를 기소해 복수를 하려고 하지만, 관타나모의 실상을 깨달은 후 깊은 고뇌에 빠진다. 그러던 그는 끝내 교회를 찾은 후에 마음을 정한다. 정의를 추구하고, 무고한 이들을 도우라는 신의 말씀에 응답한다. 그는 법조인으로서, 동시에 개신교인으로서 슬라히를 기소할 수 없다고 결단을 내린 뒤, 군복을 벗는다. 이렇게 개인의 믿음과 신념은 비록 그 대상과 방식은 다를지언정 정의를 바로잡는 초석이 된다.

이처럼 개인의 종교적 믿음과 신념을 전면에 내세운 스토리텔링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야기에 감정적인 면을 북돋아 준다. 특히 신에게 호소하는 슬라히, 미국의 법과 헌법을 굳게 믿는 낸시, 신의 가르침과 헌법 정신의 공통점을 실천하기로 결심한 코치 중령의 모습이 한 데 응축된 것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법정 장면이 백미다.

8년 만에 서게 된 재판장에서 살라히는 그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일은 큰 충격이었지만 미국이 저지른 범죄를 자신이 용서했기에 자신은 자유라고 주장한다. 신의 가르침대로 아랍어로 자유와 용서는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또 법정과 판사의 결정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미국의 법정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법의 정의를 실현할 것이기 때문에, 법정에서의 선고는 그에게 신의 뜻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영화 <모리타니안> 스틸 컷 ⓒ (주)디스테이션

 
더 나아가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살라히가 무고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할 기회도 준다는 점에서 더욱 호소력이 짙다고 볼 수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를 탄생시킨 테러와의 전쟁 및 미국과 중동 지역의 외교적 분쟁은 역사적, 정치외교적 뇌관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폭탄임이 분명하다.

영국의 식민통치, 유대인의 이주, 4번의 중동전쟁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테러단체의 활동,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미국의 대외 정책과 그로 인한 반미 감정이 한 데 어우러진 결과다. 이러한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는 흔히 이슬람교와 기독교라는 두 세계 종교의 충돌이라는 피상적인 그림 밑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두 종교의 신이 알려준 가르침과 미국 법정의 정신이 다르지 않다는 <모리타니안>의 메시지는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 종교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두꺼운 물감에 가려진 밑그림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한편 영화의 두 플롯 중 나머지 하나는 낸시와 코우치 중령을 대조시키며 신에 대한 믿음, 그에 못지않은 법에 대한 신념을 의심하고 필요한 경우 과감히 꺾을 줄 아는 용기를 이야기한다. 낸시는 철저히 공적인 가치와 원칙에 입각해서 재판을 준비한다. 애초에 슬라히의 재판을 맡기로 한 것도 프로보노 활동의 일환이었던 만큼, 그녀에게 이 사건은 단지 무너진 법치주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낸시는 어머니에게 전화해달라는 슬라히의 요청을 연민과 동정심을 자아내려는 피고인의 전략으로 취급할 정도로 슬라히에게 인간적이고 사적인 교류를 일절 하지 않는다.

반면에 코우치 중령에게 슬라히 사건은 일, 업무, 국가적 차원의 사건이기 이전에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이번 사건은 무죄 추정의 원칙과는 별개로 절대 틀릴 수 없는 사건이다. 실제로 슬라히의 재판에 투입된 직후 그는 가장 먼저 죽은 친구의 아내를 찾아가 범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낸시와 코우치가 관타나모 수용소 휴게소에서 만난 장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코우치 중령은 그녀가 미국의 적을 옹호한다고 비꼬며 이길 수 없는 재판을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에 낸시는 자신이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변호사라고 비난받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슬라히는 아직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서 미국의 사법 제도가 허점이 존재했다면 어떡할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이처럼 사적인 분노와 적개심과 공적 가치에 입각한 질문과 대답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사건에 인위적이면서도 강력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동시에 상당히 인상적인 연출을 통해 그들의 신념과 원칙을 한 번에 무너뜨리면서 그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작중 과거와 현재 장면은 각각 1.33: 1과 2.35: 1의 다른 화면 비율로 표현되는데, 두 주인공이 관타나모의 진상을 알게 되는 상황에서는 두 화면이 겹쳐져서 나타나며 그들이 받은 충격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킨다. 

이는 둘이 슬라히의 사건을 대하는 자세가 180도로 달라지는 것에 대해 강력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제 낸시는 살라히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와 고통을 한 인간으로서 보듬어주려고 하고, 반대로 코우치 중령은 모든 개인적인 원한을 뒤로한 채 공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이렇게 <모리타니안>은 상황에 따라 추구하는 정의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꺾을 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되는 아이러니를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제시하며 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다만 사건의 진상과 해결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범생처럼 훑고 지나가는 정공법을 취해서인지 영화는 간과하기 어려운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자행되었는지가 세상에 알려진 지도 오래된 상황에서 과연 잔혹한 고문 기법을 그리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물고문과 성고문을 비롯해 시청각을 괴롭혀 잠을 못 자게 하고, 슬라히의 어머니를 납치한 후 강간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말로만 들어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만한 고문을 연달아 보여준다. 

이는 고문 장면이 그렇게까지 세세하지 않아도 진상을 깨달은 낸시와 코우치 중령의 충격, 슬라히가 겪어온 고통을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연출로 보인다. 슬라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의 이야기가 잊힐 정도로 분량이나 비중 배분에 있어서도 아쉬움을 남기며, 상당히 긴 시간 동안 해당 장면이 지속되다 보니 피로감이 누적되어 그 충격이 갈수록 약해지는 역효과도 낳는다. 그 결과 <모리타니안>은 배우들의 연기, 작품의 메시지, 연출과 편집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진 강렬한 임팩트를 스스로 깎아내리며,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작품, 영국 작품, 각색, 남우주연, 촬영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 아쉬운 완성도로 관객을 마주한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와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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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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