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진도대교와 전두환, 그 내막을 전혀 몰랐네

[세상을 잇는 다리] 역사의 울림이 들려오는 울돌목에 놓인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

등록 2021.03.17 21:07수정 2021.03.17 21:07
2
원고료로 응원
넓은 강이나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실현되기 시작한다. 짧게는 수백 미터에서 길게는 수십 킬로미터를 다리를 놓아 건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의지만 있다면 건너지 못할 강이나 바다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무엇보다 다리를 지탱시켜주는 기초공법의 발달에 기인한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깊은 물속에, 단단한 구조물을 마치 움직이지 않는 바위처럼 심을 수 있게 되었다. 물 속 상황과 지형·지질에 따라 적용 가능한 공법이 발달된다. '우물통(Open caisson) 기초'가 대표적이나 너무 깊은 물속에선 기술적인 한계를 보인다.


뉴욕 브루클린교(Brooklyn Bridge)에서 맨 처음 시도된 '뉴매틱 케이슨(Pneumatic caisson, 하부에서 바닥 굴착이 가능한 넉넉한 공간이 있는 잠함(潛函)을 만들어 가라앉힌 후, 하부에 수압보다 높은 공기압을 불어 넣어 물이 없는 작업공간을 확보하는 공법) 기초'가 발달하여 일반화된다. 이 공법은 연속보로 이어지는 긴 해상교량이나, 사장교·현수교 등에 범용으로 쓰이게 된다.
  

인천대교 시공 모습 해상교량 구간만 18.35k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장 교량이다. 이렇게 긴 다리를 가설 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초 작업의 발달에 기인한다. 사진 중간 사장교 주경간은 800m로 역시 우리나라 최대다. ⓒ 인천대교(주)

 
사장교 구성은 비교적 단출하다. 사하중(다리자체하중)과 활하중(다리를 이용하는 차량 등의 하중)을 늘어나는 힘으로 지탱하는 경사케이블, 경사케이블의 수평분력과 활하중에서 오는 휨 모멘트를 지탱하는 보강 형(補剛 桁, Stiffening girder), 이 모든 하중을 한 곳으로 모아 지지해 내는 주탑(主塔)으로 구성된다.

정통성 없는 쿠데타 세력

1979년 12월부터 신군부라 불리는 전두환 일당이 총칼로 정권과 나라를 도둑질한다. 악랄하고 비열하다. 특히 광주에선 선량한 시민들을, 그것도 나라를 지키라는 군대까지 동원시켜 죽인다. 무자비한 살육이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다. 당시엔 '광주사태'라 불렀다. 참으로 뻔뻔한 짓이다. 이 모두는 정권의 정통성에 심각한 허점과 오점으로 작용한다. 전두환에겐 전라도 시민들 이목을 돌려세울 방안이 필요해진다.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아니다.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다. 즉자적이고 단순한 행위를 선택한다. 1977년부터 시작된 '광주권 2단계 지역개발사업' 타당성 조사가 바탕이다. '호남지역종합개발'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시민들을 현혹시킨다. 여전히 한 손엔 총칼을 들고, 다른 손으론 시민들 눈 가리기에 바쁘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인다. 다리와 댐이 좋은 재료가 되어 주었다. 주암 등지에 댐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여수시와 돌산대교 국동항과 돌산도를 연결하는 돌산대교가 사진 중간하단에 보인다. A형 강재주탑으로 설계되었다. 사진 좌측 중간 꺾인 부분이 진남관 앞바다고, 우측 중간 멀리에 사장교인 거북선대교가 보인다. ⓒ 여수시청

 
우선 여수(돌산대교)와 진도(진도대교)에 큰 다리를 놓기로 한다. 전두환 일당으로선 획기적인 것들이라 여길 만한 사업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리는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없는 형식이어야만 했다. 바로 사장교다. 그래야 뉴스의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은행(World Bank(IBRD), 빈곤퇴치와 개발도상국 경제발전을 목표로 설립된 다자간개발은행)에서 구걸하다시피 차관을 끌어들인다. 돌산대교는 승인이 나지만, 진도대교는 보류된다. IBRD는 교통수요부족과 우리 설계·시공능력을 의심한다.


긴 설득으로 승인이 이뤄진다. 결국 영국과 미국 기술진에게 설계가 맡겨진다. 다리는 쌍둥이로 설계된다. 1978년 시작된 타당성조사 및 기본설계가 지지부진하다. 국내 정치상황 때문이다. 1980년 실시설계가 급속 마무리 된다.

판 돈 걸린 도박처럼 진행되는 공사

여수시내와 돌산도, 진도와 화원반도를 각각 잇는 다리다. 다른 점이라면 자연환경 차이 뿐이다. 여수에 짓는 다리는 내해의 잔잔한 바다고, 진도에 짓는 다리는 바닷물이 울어댄다는 '울돌목'이다. 따라서 기초 작업의 여건에서 현격한 차이가 진다. 여수는 해상에 뉴매틱 케이슨 기초로 작업해야 하고, 진도는 육상부에 거치하는 기초 작업이다. 공법 난이도에서 돌산대교가 불리하다.
  

진도대교 모습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쌍둥이 사장교 모습이 주변 섬 풍광과 어우러져 수려하다. 사진 우측 제1 대교가 A형 강재주탑으로 여수 돌산대교와 같이 설계되었고, 좌측 대교가 같은 모습으로 2001년 착공되어 2005년에 완공 된다. ⓒ 이영천

 
두 다리는 1980년 12월 26일 동시 착공된다. 공사를 수주한 건설 회사들은 정치·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 제1호 사장교'라는 칭호는 물론, 강력한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최고 권력자를 준공식에 초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권력에게 아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욕망이 앞서니 두 눈이 가려진다. 사장교를 시공해본 경험은 전혀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공사에 임한다. 흔히 말하는 '돌관작업(突貫作業, 장비와 인원, 자재를 집중 투입하여 한달음에 해내는 공사)'이다. 노동자 인권과 안전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누가 빨리 짓는가의 진흙탕 싸움이다. 마치 큰 판돈을 걸고 달리기 시합을 하는, 도박판을 닮은 모양새다.

두 다리 모두 1984년에 준공된다. 진도대교가 10월 18일에, 돌산대교가 12월 15일이다. 진도대교가 준공된 날, 시차를 두고 주암댐 기공식도 열린다. 독재자 전두환은 당연하다는 듯 진도대교 준공식과 주암댐 기공식에 참여한다. 나쁜 권력과 건설대기업의 손뼉이 잘 맞아 떨어진다. 환상적인 이해관계의 절묘한 조화다.

이들 다리는 연륙교(連陸橋)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다. 고립된 섬을 육지와 연결시켜 준다. 그러나 이를 정권의 선전도구로 사용한 행태가 문제다. 전임 독재자를 쏙 빼 닮았다. 토건국가(土建國家, 토건업과 정치, 관료, 언론, 토호세력 등이 이해관계로 유착됨은 물론 세금탕진과 환경을 파괴시키는 체제)의 작동이다. 진도대교 시공경험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수주발판이 되었다하나, 1982년 착공한 페낭대교에 완공되기 전 진도대교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는 의문이다.

쌍둥이 다리로 재탄생

이런 사유로 진도대교는, 완공기준 우리나라 최초 사장교가 되었다. 길이 484m의 진도대교는 2차선(폭 11.7m)이다. 69m 높이 'A형' 강재(鋼材) 주탑에, 경사케이블을 비대칭으로 걸어 바람을 고려한 유선형 보강 형을 매달았다.

당초 설계하중이 DB-18 2등급(총중량 32.4t이하 통행) 교량이었다. 많은 화물을 실은 대형트럭 등의 통행이 불가능한 다리였다는 의미다. 이로 인한 여러 불편함이 발생한다. 이에 2000년 설계하중 DB-24 1등급(총중량 43.2t) 새로운 다리를 구상한다. 결국 다리는 쌍둥이 사장교로 구상되어진다.

2001년 12월에 착공한다. 착공 전 현장을 답사했다. 그때 화원반도 쪽 휴게소에서 맛 본 우럭매운탕을 평생의 맛으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음식 몇 가지를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반드시 끼워 넣을 만한 맛이다. 2017년 다시 방문한 진도 길, 휴게소 그 우럭매운탕 집은 폐업하여 없어져 버렸다. 그리운 맛을 잃었다. 마치 첫사랑의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무척 아쉬웠다.
  

진도대교 해상 야경 울돌목 바다를 비추는 둥근 달이, 한산섬에서 시조를 읊은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다. 쌍둥이 진도대교 경관조명이 수려하다. ⓒ 진도군청

 
새로 지은 다리는 폭원이 0.5m 넓어진다. 2005년 12월에 준공한다. 1984년에 지은 다리의 설계하중도 1등급으로 보강하여 개선시킨다. 이젠 누가 빨리 짓는가의 경쟁 따위는 벌일 필요도 없다. 화원반도 쪽 우수영 관광지나, 진도 망금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진도대교는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진도대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쌍둥이 다리가 아니다. 주탑이 선 교각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만들어진 다리 교각이 'H형'이고, 나중에 만든 교각은 '횃불형'이다. 따라서 높은 곳에서 유심히 살펴보면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남해안에 연이어 늘어선 섬들의 모습과 잘 어우러진 진도대교는, 우리에게 분명 멋진 풍광을 선사함에는 틀림없다.

명량해전 승리를 일궈낸 울돌목
  

명량대첩 기념 탑 울돌목 화원반도 쪽 우수영 관광지에 세워진 명량대첩 기념 탑이다. ⓒ 이영천

 
진도대교가 지나는 울돌목은 우리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바로 '명량해전'이다. 울돌목은 좁은 곳이 330m에 불과하다. 수심도 들쭉날쭉 하여 (-)2m∼(-)26m에 이른다. 해저는 크고 작은 암초가 널려 있어, 물길을 잘 아는 사공이 아니면 지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넓은 물길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울퉁불퉁한 암초에 부딪치면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런 까닭으로 물이 돌면서 소리를 낸다. 이를 마치 '물이 우는 소리 같다'하여 鳴(울 명)을 써 명량해협이라 부른다. 유속은 물속에서 평균 5.5㎧이고, 표층에선 6.5㎧으로 물살이 무척 빠르다.

정유년(1597)에 왜란이 다시 일어난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보다 훨씬 더 잔인한 전쟁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은 물론이고 코와 귀가 잘려 나간다. 잡혀서 국제노예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전라도를 비롯한 하삼도(下三道) 점령전쟁이다. 이 지역에서 조선인의 씨를 말리고, 왜놈들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려 했다. 따라서 그만큼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전쟁이었다. 이곳 울돌목이 역사에서 벌어질 뻔한 비극을 막아낸 물길이다.

명량해전으로 정유재란 흐름이 바뀐다. 명량에서 길이 바뀐 썰물의 흐름이다. 육지에서 전주를 점령한 왜군은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한다. 왜 수군은 길을 돌려 부산을 거점으로 남해안에 둔취한다. 육군도 남해안 일대로 내려와 울산에서 순천까지 해안가에 왜성(倭城)을 연달아 쌓고, 현지 점령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화원반도 우수영 관광지에 세워진 비(碑)다. 이 글귀를 일부 정치인들이 왜곡해석한 후, 인용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 이영천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1593년) 격려 글과 물품을 보내 준 현덕승(玄德升)에게 답 글을 보낸다. 글에서 한산도로 진(陣)을 옮겨 적의 해로를 차단하려는 까닭을 밝히며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라 말한다. 그때도 무기와 식량, 군사와 격군(노 젖는 사람)을 호남에 기댔다. 정유재란 때는 오로지 호남 백성들과 이순신의 힘만으로 나라를 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도대교 쌍둥이 사장교는 역사의 그 물길 위로 유려하게 뻗어 있다.
#사장교 #5.18민주화운동 #진도대교 #돌산대교 #명량해전_울돌목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