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이제야 제대로 바라봅니다

그림책을 통해 본 '아버지'라는 단어에 대한 고찰

등록 2021.03.03 16:26수정 2021.03.0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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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주제별로 나누어 개인적인 삶과 사회와 연결하여 연재 중이다. 2화는 1화에 이어 ‘아버지’라는 주제의 그림책을 소개하며 아버지와, 아버지로 사는 나에 대해 글을 쓴다.[기자말]
'좋은 아빠야?' 어릴 적 아버지에게 마음속으로 했던 질문이었다. 지금은 딸을 혼내고서 나에게 하는 질문이다. 필자는 이전 기사에서 아버지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어린 시절을 누리지 못해 사람과 어울려 살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1화 기사 참고: 갑자기 돌아온 아버지...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오늘 소개할 그림책은 아버지에 대한 내 생각에 균열을 가져오고, 어둠 속에 조금씩 빛이 새어들어 오는 느낌을 주었다.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 문학동네

 
노인경의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나의 마음에 작은 꽃을 선물한 책이다. 코끼리 아저씨 뚜띠는 먼 곳으로 물을 길으러 간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네 마리의 아기 코끼리를 위해서 양동이 가득 100개의 물방울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간다. 더위에 지쳐 힘들기도 하고, 덜컹거리는 길과 으스스한 분위기에 공포를 느낀다. 허겁지겁 도망치다 떨어지고, 넘어지며 물방울을 잃어간다.


잠시 선인장 열매의 달콤한 유혹에 취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물방울로 도움을 주기도 한다. 벌과 뱀에 쫓기고, 기린이 물방울을 훔쳐 먹기도 한다. 몇 개 남지 않은 물방울을 새들이 가져가면서 양동이는 비게 된다. 코끼리 아저씨는 운다. 울음은 곧 비가 되어 내린 듯하다. 양동이가 가득 채워진다. 아빠 코끼리는 아기 코끼리에게 100개의 물방울이 담긴 양동이를 가져다준다.

100개의 물방울과 선인장 열매만이 색을 가진다. 100개는 가득함을 뜻한다. 내 아버지는 항상 가득하고 풍족한 삶을 채워주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마음은 현실과 달랐다. 풍족한 삶을 채우려고 늘 밖에만 계셨고, 오히려 그건 내 마음의 빈곤을 가져왔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삶은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하루는 나에게 보이지도,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조금씩 보인다. 아버지의 삶이 신산스러웠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꼈지만 두렵고, 억울하고, 눈물 흘리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는 참 우둔한 사람이다. 코끼리 아저씨의 하루를 눈으로 보고서야 그 사람이 아프고,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싫어했다'는 고백은 나의 부족함을 드러낸다.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무엇을 주었는지에 대한 갈증만 느끼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나를 보았다. 눈으로 보았던 아버지 삶의 궤적에 보지 못한 진실이 담겨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아버지는 그림책 속 코끼리 아저씨처럼 세상을 무서워하면서 좌절했던 순간이 있었을 게다. 아버지는 남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겨 억울하고 분노했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 나는 해준 것이 없다. 반겨주지도 못했고, 힘을 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공간에 사는 남과 같았다.


이제 나는 아버지가 되어가는 중이다. 하루가 고단하여 퇴근 후에도 아이를 기다려주고, 손을 잡아주는 일이 쉽지 않다. 가끔은 힘들고 지친 아버지를 알아주지 못하는 딸에게 서운함마저 느낀다. 보이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함을 알아간다.

<작은 발견>을 통한 늦은 발견
 

<작은 발견> 표지 ⓒ 사계절

 
그림책 작가들의 통찰은 놀랍다. 그들이 느끼는 통찰의 순간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그림과 글로 표현해낸다는 일이 보통의 능력은 아니다. 책을 덮고 이런 생각이 드는 작가 중 한 명이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이다. 1960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코페르니쿠스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한 그의 이력에 대학 이름값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그림은 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실을 감아 두는 작은 도구인 '실패'를 가지고 인생을 이야기한다.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이 풀려나갔어요.'

'실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특별한 날을 꾸미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 등을 한다. 늘 좋은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해치기도, 타인을 옥죄기도 하면서 실들이 심하게 꼬이기도 한다. '실패'들은 대가 없이 그저 자신들이 해낸 일에 대해 바라보며 만족했다. 인생의 어디 즈음에서부터는 저절로 풀리는 경우도 생긴다.

늙고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풀어낼 실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실패의 실을 풀어내면서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던가?

아버지의 '실패'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남은 인생은 어떨까? 얼마나 남았을까?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을까? 등 정확히 답변할 수 없는 질문들이 맴돌았다. 아버지라는 '실패'에 실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실과 실 사이에 실패의 몸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전 전화벨이 울렸다.

"아들, 아빠 병원이다. 허리가 아파서 간단한 수술 하러 왔다. 오후 1시에 수술 들어가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수술이 잦아지고, 몸이 불편해진다. 다리에서 시작해서 허리로, 병원의 차가운 침대에서 칼을 댄다. 아버지의 '실패'에서 실이 다 풀려버리기 전에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여전히 나는 <거리에 핀 꽃>의 아이처럼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의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발견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사계절, 2015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 2013 브라티슬라바 국제원화전시회 황금사과상 수상작

노인경 (지은이),
문학동네, 2012


#그림책 #아버지 #독서토론 #황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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