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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에 '독립유공자 인정' 신청하는 이유

102년 전 의령 '신반의거' 주동자 박재선 선생 후손 신청 ... 보훈처 '객관적 자료 없다'

등록 2021.02.28 15:03수정 2021.02.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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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 15일 세워진 <기미삼일운동독립기념비> 안내판. ⓒ 윤성효

 
"국가보훈처는 없는 자료만 열심히 찾고 있는 것 같다. 미결수로 수형을 살던 '진주감옥'은 6.25전쟁 때인 1950년 10월 27일 화재로 그 이전의 형행 관련 자료는 소실되어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일제의 경찰 조사서나 재판 기록을 찾지 못했다. 당시의 자료가 있었다면 증언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인후보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때의 일제가 남긴 자료만을 객관성 있는 자료라고 하는 것은 객관성의 폭을 너무 좁게 잡은 것 같다."

102년 전 경남 의령 부림면 신반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 가운데 한 인물인 박재선(朴載善, 1888~1957) 선생의 후손이 한 말이다. 후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보훈신청을 했지만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독립운동을 인정해 달라며 진실화해위에 신청하기는 매우 드문 사례다.

후손들은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고문의 도움을 받아 조만간 진실화해위에 신청서를 낸다. 진실화해위가 다루는 진실규명 범위에는 '일제강점기 또는 그 직전에 행한 항일독립운동'도 들어 있다.

김영만 고문은 "진실화해위에서 박재선 선생의 독립운동이 인정된다면 첫 사례가 될 것"이라며 "친일파들이 있었지만 독립운동가가 많았기에 독립할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국가 차원으로 예우하는 일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다.

태형 후유증으로 평생 반신 불수로 지내


박재선 선생은 1919년 3월 15일 신반장터에서 의거한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 중 1명이다. 그는 당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60대의 태형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평생 병고를 겪었다.

신반장터 의거는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월 1일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지 보름 만인 15일 정오를 기해 벌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수백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의령에서는 하루 전날 읍내에 이어 두 번째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였다.

주동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일제히 호응해 '만세 함성'으로 들끓었다. 군중들은 장터를 몇 바퀴 돌다 신반거리로 밀려나왔다.

이후 일본 경찰이 출동했다. 당시 만세 시위 주동자는 정주성·황상환·최한규·장용환·김용구·박재선·이동호·최영열·박우백 선생이다.

박재선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어 진주검찰지청에 송치되어 미결수로 6개월간 수감됐고 태형 60장을 당한 후 석방되었다. 후손들은 선생께서 태형 도중 잘못 맞아 척추를 다쳐 평생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병고로 힘든 투병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다.

신반장터 독립만세시위 주동자 가운데 최한규(건국훈장), 황상환(대통령표창), 장용환(대통령표창)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박재선(진주감옥 미결 6개월, 태형 60장) 선생과 함께 정주성(징역 10개월 진주교도소), 김용구(진주 감옥 미결 6개월), 이동호(진주감옥, 미결 6개월, 출옥 직후 사망 ), 최영열(진주감옥 미결 6개월, 태형90장) 박우백(진주감옥, 미결 6개월, 태형 60장) 선생은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박재선 선생 관련 기록은 많다. 의령군에서 펴낸 <내고장 전통>(1985년)의 '부림면 신반리 의거편', 의령군지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의령군지(상권)> '1919년 3월 15일 신반리 독립만세시위'에 박재선 선생을 비롯한 주동자들의 이름과 실형 기록이 실려 있다.

또 1990년 8월 15일 세워진 <기미삼일운동독립기념비>에도 박재선 선생을 비롯한 주동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경남지역 항일투쟁 관련 자료에도 나온다. <경남독립운동소사(상)>(1966년, 저자 변지섭)에 박재선 선생의 이름과 의거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부산경남삼일운동사>(1979년, 3.1동지회)에도 같은 기록이 있으며, <경남항일독립운동참여자록>(2001년, 마산보훈지청)도 마찬가지다.

보훈처 "객관적 자료 없다"

국가보훈처는 박재선 선생에 대해 "2016년, 2018년 민원이 접수되었으나 객관적인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라며 "2009년 보훈처에서 전국 읍·면사무소의 '범죄인 명부'를 수집했고, 의령 부림면에 대해 조사를 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보훈처는 "2016년부터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이 완화되어, 옥고를 하루만 치러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박재선 선생의 판결을 찾아볼 수 없다"라며 "민원 접수를 지속적으로 해오신 분이기에 필요하면 전수 조사를 하겠다는 답변을 했다"라고 밝혔다.

보훈처의 입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기록이 없어 박재선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인정이 어렵다는 말이다.

후손들은 "해방 이후 (60~90년대) 증언을 통한 기록들이지만 당시 위 사실을 증언한 지역 원로(상노인)들이나 이에 동의한 분들의 연령을 추정해 볼 때 일제강점기 청장년층으로 만세시위 주동자들과 다수의 참여자들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박재선 선생과 같은 경우 독립만세와 관련한 공적을 허위 조작하거나 과장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는 일"이라며 "무려 9명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유로 일경에 동시에 체포된 것을 당시 다수의 면민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 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은 "피체 이후 그분들이 당한 고초와 형벌도 당시로서는 본인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면민들의 최대 관심사였을 것이기에 특정인의 형벌을 과장할 수 없는 상황과 조건이었다"라고 했다.

신반의거 주동자 3명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것과 관련해, 후손들은 "당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의령군 부림면 현지에 남아 있는 기록과 증언을 두고 객관성 부족이라는 말로 박재선 선생을 비롯한 여섯 분들의 공적을 일고의 가치 없는 것으로 전면 부정할 수 없다"라고 했다.

김영만 고문은 "그동안 독립공훈을 허위 또는 과장하여 서훈을 받은 일부 가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 서훈을 치탈한 사례들이 생김에 따라 보훈처가 서훈심사를 엄격하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그런 연유로 심사 대상자를 모두 부정적인 측면만 보게 되면 의외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조차 무시해 버리거나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김 고문은 이어 "3.1 운동이 일어난 지도 102년이나 되었고 해방된 지도 75년이 지났다"라며 "일제 강점기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한 분이라도 더 찾아 그 분들의 공적을 잊지 않고 기리며 감사드려야 할 일"이라고 했다.

그는 "이는 한 개인이나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와 자긍심을 찾는 일이며 국가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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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8월 15일 세워진 <기미삼일운동독립기념비> ⓒ 윤성효

#신반의거 #3.1운동 #국가보훈처 #진실화해위원회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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