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목욕은 '희망'이었다

요양병원에서 자식과 손녀의 손길을 기다리던 할머니

등록 2021.02.19 15:36수정 2021.02.19 15:3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엄마의 무릎과 허리는 성한 날이 없었다. 일주일 중 5일은 두 다리로 꼿꼿이 서서 마트 계산원을 돕는 '슈퍼바이저'로 일했다. 슈퍼바이저. '판매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판매 관리자.'


엄마는 직원들만 다니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락내리락했다. 상품의 잘못된 가격을 찾아내고, 서비스 상품을 챙기지 못한 고객의 상품을 챙겼다. 계산을 위해 붙박이장처럼 서 있는 계산원의 오른팔이자, 고객 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을'이며, 만능 슈퍼우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의 퉁퉁 부은 종아리는 모나미 볼펜으로 지도를 그린 듯 혈관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손바닥 가득 로션을 발라 마른나무처럼 거친 엄마의 발을 만졌다.

'엄마는 오늘 계단을 몇 번이나 올랐을까?' 셀 수 없이 오르고 또 올랐던 계단에 엄마의 무릎 연골은 파도에 풍화된 바위처럼 닳고 닳았다. 엄마는 그런 몸으로 매주 한 번씩 바지와 소매를 똘똘 걷어 올린 채 요양병원에서 할머니 몸을 씻겼다.

요양병원에서 환자 목욕은 매주 월요일마다 요양사가 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병원 담당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타인의 수고로움에 마음이 불편할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엄마는 수고로움을 직접 자처했다. 그러다 엄마의 무릎이 고장 났다. 병원서는 엄마 무릎 연골이 닳았다며 당장 수술을 권했다.

"딸, 엄마 무릎 수술해야 한데. 엄마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무릎 수술, 회복 한 달 동안 엄마는 할머니 목욕을 내게 부탁했다. 엄마는 자신의 몸이 아파도, 남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 불편한 마음을 안고 있을 할머니부터 생각했다. 손끝이 야무진 엄마만큼은 못하겠지만, 할머니를 씻겨드리는 일이 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짠, 할매 내 왔다."

"왔나."

"할매, 오늘은 내가 목욕시켜주려고 왔다."


할머니는 관절염으로 걷기 쉽지 않았다. 오랜 요양병원 생활은 할머니 다리를 자꾸만 더 약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를 침대서 일으키고 내리는 과정 동안 할머니는 온전히 내게 몸을 의지해야 했다. 나는 할머니 다리가 어디가 어떻게 아플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섣부르게 할머니 몸을 일으키자 할머니가 소리쳤다.

"아이고, 야아, 린아 할매가 할게. 기다리 봐라."

할머니는 오른손으로 침대를 집고 왼손으로 내 손을 잡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나무 꼬챙이 같은 팔로 무릎을 하나씩 잡아당겨,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침대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잡아, 엉덩이를 밀어 겨우 두 다리를 땅이 디뎠다. 한 손은 보조기 다른 한 손은 나를 잡고 발을 끌며 겨우 발을 뗐다.

나는 소매와 바지 끝을 돌돌 말아 올렸다. 샤워기를 들어 손바닥을 쏟아지는 물에 갖다 대 온도를 맞췄다. 할머니를 플라스틱 의자에 앉히고 샤워타올에 바디워시를 묻혔다. 샤워타올 에 거품을 양껏 낸 뒤 할머니 몸 구석구석 닦았다. 샤워실은 금세 희뿌연 수증기로 가득 찼다. 내 이마에서부터 땀이 흘러 눈이 따가웠다.

"할머니, 시원하지?"

나는 눈꺼풀 위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물었다. 할머니가 빙그레 웃었다.
어릴 적 할머니와 대중목욕탕을 갔던 일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시간 날 때마다 목욕을 즐겼다. 할머니는 오래도록 온탕에 몸을 담갔다.

어릴 적 나는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탕을 나와 할머니를 기다렸다. 나는 피크닉 음료수를 빨대로 쪽쪽 마셔가며, 할머니 몸을 찬찬히 봤었다. 말라버린 포도알 같은 할머니의 가슴. 녹아버린 마시멜로처럼 힘없이 늘어진 뱃살. 뼈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

다시 마주한 할머니 몸은 그때보다 시간을 더 먹었다. 샤워를 마치고 반들반들한 할머니 종아리를 매만지며 오일과 로션을 치덕치덕 발랐다. 하얗게 센 할머니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내 소매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너거 엄마랑 니 보는 게 내 유일한 희망이다."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봤다. 뜨거운 열기에 볼이 빨개진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응."

나는 더 나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할머니 종아리에 로션만 더 치덕치덕 발랐다.

요양병원의 하루는 정해진 계획표대로 움직였다. 오전 7시. 요양보호사가 뜨거운 김이 폴폴 나는 수건과 양치 도구를 환자에게 나눠줬다. 8시 아침 식사 후 의사가 회신을 돌며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12시 점심 식사. 식사가 끝나면 물리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이따금 물리치료를 받고, 산책하러 나가고 싶은 환자는 요양보호사에게 말해 병원 앞 벤치에서 30분 시간을 보냈다. 오후 5시 30분 저녁 식사. 8시 취침. 병실에 형광등이 꺼졌다.

할머니는 식사 후 졸리면 눈을 감았다. 이따금 자신을 돌봐주는 요양보호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병실 벽면 티브이는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환자들은 무언가 먹거나 눈을 감고 자거나, 멍하니 창밖만 봤다. 별다를 게 없는 요양병원의 일상이 오늘도 내일도 지루하게 계속됐다.

그런 할머니에게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자식, 손녀와의 만남은 큰 행사였다. 나는 할머니 삶의 하나뿐인 낙이자, 할머니의 유일한 희망이 돼버렸다. '더 자주 뵙자.' 병원서 할머니를 뵙고 돌아올 때 나는 매번 이렇게 다짐했다. 그러다 나는 일상을 꾸리기 바빠 또 다짐을 까맣게 잊었다.

'희망, 희망, 희망.' 할머니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단어가 자꾸 귓전에 맴돌았다. 소매 끝으로 눈을 닦아냈다. '진즉에 더 자주 찾아뵐 것을.' 나는 새로 먹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단어를 외웠다. 

'희망, 희망, 나는 할머니의 유일한 희망.'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 게재됩니다.
#공감에세이 #할머니 #추억 #기억 #역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2. 2 "윤 대통령, 달라지지 않을 것... 한동훈은 곧 돌아온다"
  3. 3 왜 유독 부산·경남 1위 예측 조사, 안 맞았나
  4. 4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5. 5 창녀에서 루이15세의 여자가 된 여인... 끝은 잔혹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