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내 같다" 떨어진 목련을 보며 할머니는 말했다

할머니의 화상 사고, 이어진 요양병원에서의 일상

등록 2021.02.18 14:07수정 2021.02.1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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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남에게 빚지기 싫어했다.


"이것 좀 해줄래?" 이 말을 할머니는 몇 번이고 삼키고 삼키다가 남에게 부탁했다. 행여 부탁할 상황이 오면, 요구르트 한 줄이라도 사서 할머니 마음에 진 빚을 갚았다. 그런 할머니가 그나마 마음 편하게 부탁을 하는 사람이 엄마와 나였다.

"린아, 화상연고 좀 사 온나."

전화기 너머 들리는 할머니 목소리에 힘이 없다. 뜨거운 물을 병에 옮겨 붓다가 쏟았는데 발을 다쳤단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일터에 출근해야 하는 엄마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할머니 전화를 받은 다음 날, 대학서 들어야 하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버스에 올랐다. 화상연고와 밴드가 담긴 흰 비닐봉투를 꼭 쥔 채 할머니 집으로 향했다.

계단 수십 개를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찼다. 심호흡 한 번 크게 쉰 뒤 다시 계단을 올랐다. '드르륵' 할머니 집 대문이 그냥 열렸다. 열린 문으로 햇빛이 사선으로 방을 비췄다.

낮에도 빛이 들지 않아 캄캄한 집 안. 침대 위 굽은 등이 희미하게 보였다. 벽을 손으로 더듬어 형광등을 켜자, 할머니는 눈이 부신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반쯤 떠 침대 위에서 나를 바라봤다.


"왔나."

할머니는 푸석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작은 몸을 덮은 이불 아래 가죽만 남은 발은 살갗이 뭉개져 퍼렇게 변했다. 두 발바닥은 화상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옆집 사람에게 약을 사오라 부탁해 밴드를 붙였단다. 할머니는 혼자 치료해보려 끙끙대며 참다 내게 전화했던 거였다.

"아유, 왜 이제 전화했어. 이렇게 아프면서! 자식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발이 이게 뭐야."

할머니 발을 보자마자 속상한 마음에 나는 울며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할머니는 발을 딛지 못해 며칠째 굶었단다. 팔과 종아리는 나무꼬챙이처럼 얇아졌고 입술은 껍데기가 벗겨졌다. 부리나케 밥솥에 밥을 안치고 엄마가 챙겨준 반찬을 꺼냈다. 발에 붙어있던 밴드를 떼어 내고 새로 화상 밴드를 바르면서 나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엄마, 할머니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두 발 전체에 화상을 입어서 걷지도 못하셔."

아빠가 퇴근길 할머니 집으로 왔다. 아빠 등에 업힌 할머니는 연신 "김 서방, 고생 시켜 미안하네"라는 말만 반복했다. 2012년 12월. 할머니 집 탁상 달력은 그날 이후 더 넘어가질 않았다.

"우리 엄마 내가 모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만 괜찮으면 그러고 싶어."

엄마의 소망은 소망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바로 봐야 했다. 사립대학에 다니는 딸 둘. 엄마는 일터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고, 걷지 못하는 할머니를 혼자 집에 둘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한 달 간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았다. 보조기기 없이 걷지 못하는 할머니는 더 이상 혼자 일상을 누릴 수 없었다.
 

할머니의 봄나들이 박은정(왼쪽)씨와 함께 병원서 나온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매화꽃을 바라보고 있다. ⓒ 김예린

 
집에 홀로 있어도 '티브이가 있어 외롭지 않다'고 말하던 할머니는 코끝 시린 겨울, 집이 아닌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50cm 채 되지 않는 할머니의 작은 몸을 뉠 침대 하나. 그곳이 할머니에게 허락된 유일한 개인 공간이었다.

요구르트 사 먹을 지폐 몇 장이 담긴 동전 지갑, 입술보호제, 휴대폰, 스킨, 로션. 침대 난간에 걸린 바구니 안 물건들이 할머니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은정아, 내복 좀 사온나. 돈 줄게."

"예린아, 입술에 바르는 것 좀 사오너라."

엄마와 나는 할머니와 통화가 잦아졌다. 심부름을 시키는 할머니 말 뒤에는 '보고 싶다. 얼른 오너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할머니를 만나러 요양병원을 찾았다. 그해 겨울은 가고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할머니 병실 창밖에 나뭇가지는 새순이 돋았다가 초록 나뭇잎이 풍성해졌다가, 낙엽이 지고 빈 나뭇가지만 남았다.

할머니는 창을 보며 계절이 옷 입는 모습을 마주했다. 그리고 요양병원에서 두 번째 봄을 맞았다. 병원 인근 주택 사이에서 분홍빛 매화꽃이 빼꼼, 인사를 건넸다. 봄소식을 나만 듣기 아쉬워 할머니를 휠체어에 앉혀 엄마와 함께 병원 인근 공원 산책에 나섰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에서 할머니는 주택 사이에 핀 매화꽃을 가리키며 봄을 눈에 담았다. 공원 의자 앞 할머니 휠체어를 세우고 엄마가 의자에 앉았다. 엄마가 할머니 머리를 손으로 쓱쓱 매만졌다.
 

떨어진 목련꽃잎 할머니가 휠체어 앞 떨어진 목련꽃잎을 주워 매만지고 있다. ⓒ 김예린

 
'툭'

의자 옆 나무에서 시들어버린 목련 한 송이가 할머니 휠체어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목련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뒹군다. 할머니는 떨어진 목련을 집어 목련 잎을 살며시 만졌다.

"떨어진 꽃이 꼭 나이 든 내 같다."

담담하게 읊조린 할머니의 말에 답을 해야하는데, 나는 말문이 막혔다. 위로의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어설프게 할머니를 위로할 수 없었다. 할머니 옆에서 나는 시린 마음만 꿀떡 삼켰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 게재됩니다.
#공감에세이 #할머니 #추억 #기억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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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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