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염정, 적거지에 핀 학문의 꽃

미암일기와 함께 떠나는 조선 사림의 꿈과 일상⑥

등록 2021.02.14 16:11수정 2021.02.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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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동복의 물염정 물염정은 송정순이 '띠끌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을 담아 지은 정자로 사림들의 교유처가 되었던 곳이다. ⓒ 정윤섭

  
화순 동복은 산세가 깊어 산수경관 또한 매우 뛰어난 고장이다. 이곳에는 특히 단애절벽의 경관이 아름다운 '적벽'이 있다. 옹성산(572m)을 배경으로 깎아지른 듯 수백 미터 펼쳐져 있는 적벽은 동복호수와 함께 절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연이 아름다우면 꽃을 찾아드는 나비처럼 그곳을 찾아드는 이들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정자를 세우고 학문을 논하며, 자연을 노래하고 시와 노래를 남긴다. 적벽의 북쪽 상류 계곡 지류에 세워진 물염정(勿染亭)은 그 중심 무대이기도 하다.


적벽으로 유배 온 최산두
 
 

적벽의 절경중에 하나인 창랑적벽 적벽에는 물염정 옆의 물염적벽을 비롯해 뛰어난 경관마다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 정윤섭

 
적벽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온 최산두(1483~1536)와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최산두는 정4품 의정부 사인으로 재직하던 중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화순 동복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화순은 깊은 산이 많은 탓인지 여러 유배자들이 오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최산두와 함께 조광조도 인근 능주로 유배 왔다가 결국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 곳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온 이들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산세와 자연경관이 뛰어나 도학자들의 취향과 맞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런 곳에서는 자연히 학문과 시문을 나누기에 좋았을 것이다.

유희춘이 최산두로부터 학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최산두가 이곳 동복에 유배와 있을 때였다. 김굉필이 유배지 회천에서 조광조로부터 학문을 전수받고, 최산두 역시 순천에 유배와 있던 김굉필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은 것처럼 미암도 동복에 유배와 있는 최산두로부터 학문을 전수 받게 된다. 이 무렵 유희춘은 친구인 하서 김인후와 함께 이곳을 찾아 최산두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우고 익혀 최산두의 문인이 된 것이다.

최산두는 이곳 동복 유배생활 중에 송나라 문장가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에 나오는 양자강 남안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赤壁)'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사화의 절정 기묘사화


4대 사화 중에 기묘사화는 사림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사화의 절정이었다. 이 사화로 인해 사림들은 다시는 회생하지 못할 만큼 많은 피해를 입는다. 기묘사화는 그 원인을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 일어난 훈구파의 반격으로 보고 있다.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최산두 역시 이 사화의 여파로 동복에 유배를 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어찌 보면 인연이었을까? 당시 사림들이 유배지에서 성리학을 통해 사림의 학맥을 이어가듯 유희춘 역시 유배지 동복에서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의 계보를 최산두로부터 이어받아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호남 사림들의 교유처 물염정
 

물염정의 현판들 물염정에는 김인후, 김창협, 황현 등 학문과 시문을 나눈 문장가들의 20개가 넘는 현판이 걸려 있어 물염정이 학문과 문학의 교유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정윤섭

 
호남사림들이 교유했던 주 무대가 담양의 식영정 일원이었던 것처럼 동복 적벽의 계류에 세워져 있는 물염정 역시 사림들이 교유하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적벽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한 곳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최산두는 이곳에서 '제물염정(題勿染亭)' 이란 시를 통해 이곳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백로가 고기 엿보는 모습/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江含白玉窺魚鷺 
노란 꾀꼬리 나비 쫓는 모습/ 산이 황금을 토하는 것 같네 山吐黃金進蝶鶯

   
유희춘의 절친인 김인후도 물염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명양주에 몹시 취하여 大醉鳴陽酒
돌아와 보니 삼월 봄이어라 歸來三月春
강산은 천고의 주인이건만 江山千古主
사람이야 백년의 손님일 뿐 일래라 人物百年賓
 

물염정은 병풍같이 펼쳐진 계곡의 지류에 아늑하게 들어서 있다. 신선들이 살법한 선경의 뛰어난 자연을 배경을 하고 있어 적벽에서도 이곳을 '물염적벽' 이라 부르고 있다.

물염정은 을사사화로 관직을 버리고 은둔하고 있던 송정순(1521~1584)이 지은 정자다. 그는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물염정(勿染亭)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관계에 나아갔다가 사화의 쓴맛을 보고 자연에 귀의한 당시 사림들의 심정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사화의 풍랑속에서도 자신들의 의지를 꺾지 않고 살겠다는 당시 사림들의 의지가 느껴진다.

송정순은 155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춘추관 박사를 거쳐 무안 현감, 구례 현감, 영암군수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유희춘과 함께 경사를 강론하였으나 을사사화를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동복에 물염정을 짓고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물염정 내부에는 류성운이 지은 '물염정기'를 비롯하여 조선 중·후기의 학자들인 김인후, 김창협, 황현 등이 남긴 20개가 넘는 시문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을 보면 이곳이 많은 사림들이 교유했던 시문학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암 유희춘은 김안국과 최산두 등 기묘사림의 계통을 잇고 있는데 스승인 김안국으로부터는 소학을 실천적 기본과목으로 확립하고 소학을 학문의 첫 번째로 여길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또한 김굉필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은 최산두로부터는 조선 유학의 도통을 전수받아 그의 학문과 사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화로 인해 사림들은 많은 유배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오히려 학문적 계보의 끈을 이어간 것을 보면 유배가 성리학을 추구하는 사림들에게 학문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중요한 공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최산두는 이곳 동복에서 15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에 취한 때문이었을까? 그는 유배에서 해배된 뒤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동복에서 살다가  53세에 눈을 감았다. 아마도 시끄러운 세상보다는 자연에 귀의해 은자로 사는 것이 마음 편하고 성리학을 하는 사림의 본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유희춘은 동복에서 김인후와 함께 젊은 날 학문을 배우며 사림의 계보를 이어간다. 유희춘역시 나중에 을사사화를 피해 가지 못하고 20여 년 동안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던 것을 본다면 청년기 유희춘이 학문과 자연을 접하며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던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방랑시인 김병연의 귀의
 

김삿갓 시비 풍자시인으로도 알려진 김삿갓(김병연)시비가 물염정 옆에 있다. 그가 방랑생활을 마치고 자연에 귀의한 곳이다. ⓒ 정윤섭

 
적벽의 물염정 옆에는 '김삿갓' 시인으로 알려진 김병연(1807~1863)의 비가 세워져 있다. 김병연은 세상을 등지고 방랑생활을 하다 마지막으로 이곳 동복면 구암마을에서 생을 미감했다. 그는 권력자와 부자를 조롱하는 시가 있어 풍자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결국 마지막에는 자연에 귀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병연은 생을 마치기 전에 최산두와 유희춘, 김인후 등의 자취가 남은 물염정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김병연이 살았던 시대는 16세기 사림 시대와는 다르지만, 세상에서 소외된 그가 느꼈을 삶의 무상함과 비애는 같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물염정 #적벽 #최산두 #유희춘 #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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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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