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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만 자던 곳인데... 30년 된 빌라 구석방의 변신

엄마에게도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가져보니 너무 좋다

등록 2021.02.17 19:19수정 2021.02.17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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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향후 부동산 가치를 이것저것 따져 집을 택한다는데, 나는 이것이 잘 안 된다. 내가 집을 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내 마음에 들 것'이었다. 집이 있는 곳이 아무리 조만간 값이 오를 것이라는 냄새를 풀풀 풍겨도(잘 맡지도 못한다) 현재 나의 삶에 너무 큰 변동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라면 싫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조심시키는데도 자꾸 뛴다며 매일 층간소음을 호소하던 아랫집 아주머니 때문에 사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이젠 아이들이 훌쩍 커버렸어도 아파트는 싫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춰진 블록 안에 겨우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호흡이 가빠오는 느낌이랄까.

남편은 단독주택도 원했지만, 보안상 문제와 관리의 어려움 등으로 고심하다 우리 부부가 선택한 곳이 지금 사는 3층짜리 빌라였다. 주변 아파트들이 천정부지로 가격이 오를 때 빌라에 사는 우리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선비처럼 점잔 빼며 배 아픔을 꾹꾹 누르고 있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아파트로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낡은 빌라의 구석방
 

협소한 공간이라 이 방은 정말 잠만 자는 용도였는데, 이게 최근 쓸모가 바뀌었다. ⓒ elements.envato

 
엘리베이터도 없는 30년 가까이 된 이 낡은 빌라가 난 참 마음에 든다. 이 곳을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숨어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집 구조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엔 미로 같은 구석방이 하나 있다.

이 방은 아이들 방보다 작아서 퀸사이즈 침대와 화장대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방이다. 처음 이사 들어왔을 때, 애매한 방 크기에 용도를 정하는 데 고민하다 우리 부부의 침실로 쓰기로 했다. 협소한 공간이라 이 방은 정말 잠만 자는 용도였는데, 이게 최근 쓸모가 바뀌었다.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내가 직접 손을 댈 일이 줄어드니 '나의 시간'이 생겨났다. 내가 가족과 살림을 꼼꼼히 챙기는 '현모양처' 형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늘어난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난 꼭 필요한 가사만 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그렇게도 부르짖었건만 가족들은 '엄마의 시간'을 절대로 '사적인' 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쟁취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엄마의 시간은 절대 확보되기 어려웠다. 


일과 가사를 제대로 다 하려다 보면 일하는 엄마의 시간은 공기 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지기 쉽고, 허망한 뜬구름처럼 붙잡기 어렵다. 선택과 집중. 언제나 이것이 관건이다.

그렇게 내 시간을 확보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조용히 집중해서 책 읽기? 글 쓰기? 하다 못해 스마트폰 웹서핑이라도? 무엇을 하든 나는 그냥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정에서 '엄마의 시간'은 '가족의 시간'과 동의어였으니까. '내'가 없고 '엄마'만 있었으니까. 그냥 '나'를 만나는 시간을 원했던 거다.

그런데 엄마의 시간을 오롯이 지켜내려면 엄마의 '사적인 공간'도 필요한 것 같다. 부엌 식탁이나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다 보면 엄마의 초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어찌어찌 확보한 시간을 활용해 보려고 그곳에 앉아 뭔가를 하려다 보면 온 가족이 나의 신경 레이다망에 걸린다. 집안 식구들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하나하나 실시간 포착되니, 책을 잡아도, 글을 써 보려고 해도 도통 집중이 안 될 수밖에.
   
그래서 자리 잡은 곳이 우리 집 가장 구석방이었다. 비록 등받침도 없는 작은 스툴 의자와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을 밀치고 마련한 좁은 공간이지만, 책과 태블릿을 놓았더니 그 공간이 나의 서재이자, 글을 쓰는 작업실로 바뀌었다.

오롯이 '나'로 있는 시간
 

작업 공간 by pixabay ⓒ pixabay

 
'서재'라고 하면 책이 가득 꽂힌 책장도 있어야 할 것 같고, 널찍한 책상에 작업용 PC도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이 공간은 최소한의 물건만 허용되는, 우리 집에서 유일한 미니멀 공간이다. 그래서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니 그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엄마와 아내의 시간을 침범하던 가족들이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길 때면 조심스럽게 알현(?)을 청한다. 물리적인 위치만 옮겼을 뿐인데, 사람의 인식에는 큰 차이가 생기나 보다.

일단 나부터 집중이 되어 좋다. 싱어게인 30호 가수같은 '애매한'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때는 온 가족에게 신경을 쓰느라 내 시간에 집중을 못했다. 그런데 구석에 들어와 있으니 일단 다른 가족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서 신경이 덜 분산되는 효과가 있다. 남편도 이 방에서 내가 뭔가에 집중하고 있으면 문을 빼꼼히 열었다가는 그냥 가곤 한다.

드디어 가족들에게 '엄마의 사적인 시간과 공간'이 인정된 것이다! 아내의 셀프 감금(?)이 어색한지, 남편은 가끔 들어와 건드리고 갈 때도 있고, 엄마가 고파진 아들 녀석이 무심히 들어와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쟁취한 나의 시간인데, 허투루 쓸 수 없다. 매몰차게 눈길을 거둔다.

잠만 자던 반쯤 죽은 공간, 구석방이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글을 쓰는, 그렇게 딴짓도 할 수 있는, '엄마의 사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이 공간이 참 좋다. 이 곳에 들어오면 난 내가 '나'와 만나는 것 같아서 좋다. 아내도, 엄마도 잠시 접고 이 공간에서 오롯이 '나'로 있는 시간. 엄마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엄마 #공간 #작업실 #사적인공간 #구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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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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