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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노모의 장군 김밥, 뭘 넣었다고 이런 맛이 날까요

네 덩이로 큼지막하게 썰은 김밥 한 줄... 언제까지 맛 볼 수 있을까

등록 2021.02.08 08:03수정 2021.04.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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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노모는 장군 사주를 타고났다고 했다. 그것도 기상이 드높고 웅혼한 용장의 DNA다. 복수의 점쟁이들이 그리 풀었으며, 가장 가까이서 오랜 시간 지켜본 내가 보기에도 그게 그저 부풀린 과장만은 아닌 듯싶다. 당신은 그 넘치는 용기와 씩씩함으로 한 집안을 일구는데 큰 몫을 하셨다. 일찍이 제 집을 장만하고 삼남매 공부 다 시키셨다. 물론 선친의 타고난 성실함이 그 중심이었지만 어머니의 역할도 그에 못지 않았다.


당신은 손맛으로도 유명하다. 세상 누구의 어머닌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그건 정말 특별하다. 스물 하나,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뭐 하나 제대로 배울 틈도 없었으련만 도무지 못 하는 음식이 없다. 당신께선 당신의 어머니 손맛을 대물림한 덕이라 하셨다. 그건 참으로 타당한 분석이다. 초등학생 때 외가 놀라가 몇 번 먹어본 게 다였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할머니의 손맛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미련스레 과식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용맹한 장군의 손맛
 

손맛 충만한 김장 김치 다른 곳에서는 단 한 번도 맛 보지 못한 엄마표 김장김치. 시원하고 칼칼하고 구수하고 웅숭깊다. ⓒ 이상구

 
특히 김치는 독보적이다. 보통의 배추에 흔한 젓갈과 소금 따위를 쓰는데도 그 맛은 차원이 다르다. 처음 입에 넣고 씹으면 박하처럼 화한 느낌이 입안을 채운다. 몇 번을 씹으면 어느새 고깃국 뒤끝처럼 구수한 맛이 남는다. 한 조각의 김치가 그렇게 오묘한 변주를 거듭한다. 장담하건대 나는 이제껏 세상 어디에서도 그런 김치를 먹어보지 못했다. 그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당신의 김치를 먹어본 모든 이의 소감이 크게 다르지 않다.

고추장이나 된장도 직접 담그신다. 메주야 시골 사시는 이모님이 보내주시는 것을 쓰시지만 그걸 염수에 담가 띄우고 숙성, 발효시키는 전 과정을 손수 하신다. 된장은 2~3년에 한 번씩, 그에 비해 보다 손 쉽게 만드는 고추장은 1년에 한 번 정도 연례행사처럼 하신다. 물론 사다 먹는 공장 산(産)과는 비교 불허다. 된장은 전혀 짜지 않지만 웅숭깊고, 강렬하다. 태양초만 엄선해 쓰는 고추장은 자극적이지 않은 칼칼함이 예리하다.

한여름 짭짤하게 입맛 살려주는 오이지도, 1년 365일 요긴한 밑반찬이 돼주는 고추며 마늘장아찌도 직접 담그신다. 건강할 때야 그렇다 쳐도 이제 팔순을 훌쩍 넘은데다 3년 전 큰 수술까지 받으셨다.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여전히 그 고집을 꺾지 않으시니 걱정이 앞선다. 작년에도 안 하겠다 해 놓고는 어느 날 퇴근해보니 두 식구 먹을 김장 10포기를 덜컥 담가 놓으셨다. 절인 배추 쓴 덕에 하나도 힘들지 않다 하셨지만 그게 어디 그럴까.
 

짭쪼름한 오이지 지난 여름 어머니게서 직접 담근 오이지. 지금 먹어도 아삭이고 새큼하다. 밥맛 되살리는 일등공신. ⓒ 이상구


장군 김밥에 담긴 사랑

가끔 김밥도 마신다. 당신 입맛 없을 때 곧잘 하시는 메뉴다. 드시고 싶을 때 사 오겠다 하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하긴 그러자 하셔도 어디 가서 그런 김밥은 살 수 없다. 그저 백미 밥에 시금치와 단무지, 계란 부침과 스팸 구이를 넣고 흔한 김에 싸는데도 그 맛은 여느 것과는 전혀 다르다. 치아 부실한 당신이 먹기 좋게 밥을 질게 하고 시금치를 푹 삶아선지, 크림 케이크 같은 부드러운 식감이 첫맛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향긋한 고소함은 감탄사를 절로 부른다.


어머니의 김밥은 그처럼 같은 재료, 같은 양념을 쓰는데도 다른 것과 분명 다르다. 처음은 같지만 결과가 확연히 다른 차이의 비결을 '손맛'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건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는 음식 솜씨나 노하우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의,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그 무엇을 이른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건 차라리 예술이다. 같은 악기가 서로 다른 소릴 내고, 같은 캔버스에 같은 물감을 써도 서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처럼.
 

팔순노모의 장군김밥 그 맛은 변함 없건만 크기는 날로 커진다. 당신의 사랑을 담아서일까. ⓒ 이상구

 
만화가 원작인 영화 <식객>에는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같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 말은 과연 옳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저마다의 손맛을 갖고 있다. 그건 마술이다. 영원한 미스터리다. 모든 자식들은 그런 엄마의 음식을 배우고 싶어 한다. 어쩌다 용케 흉내는 내겠지만 그 끝엔 항상 '이 맛이 아냐' 하며 좌절하게 마련이다. 엄마의 손맛은 감히 범접할 수 없다.

그래서 아쉽다.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꺼내서 물려줄 수도 없다. 몸 안의 피에 섞이지 않고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에게라도 그럴 도리가 없다. 그러니 그건 그냥 당신의 운명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떠나면 그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남은 이들은 그걸 평생 그리워하고 추억하며 살 것이다. 현실에선 다시 만날 길 없으니 남은 기억만 곱씹어야 한다. 그래서 더없이 슬프고 안타깝고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 손맛은 변함없건만, 어머니의 김밥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잘 싸매지지도 않을 만큼 두툼하게 밥을 깔고 속을 욱여넣는다. 그걸 단단하게 말 힘도 없으면서, 그래서 곧잘 옆구리가 터지는데도 점점 더 커진다. 어쩜 그건 당신의 사랑일지 모른다. 한 줄을 네 덩이로 큼지막이 썰어 놓는 것조차, 망가진 손목 때문에 칼질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더 커가는 당신 사랑을 표현하는 건지도 모른다.

큼지막한 장군 김밥 한 접시를 내오시며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내가 이걸 하면 몇 번이나 더 하겠느냐. 내 몸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할 테다. 내 손으로 해서 내가 먹을 테니 너도 많이 먹거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하겠냐는 말씀이 턱 걸린다. 그 말씀은 틀림이 없다. 우린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 그건 아주 가까운 날일 수도 있고, 약간의 여유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건 그렇게 예정 돼 있다. 그저 입방정일지 모르겠으나 어머니의 수술 이후 줄곧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생각이 불온하니 심정은 불길하고 마음은 불안하다. 공연히 조급해지고 두려워진다. 그 김에 쓸데없이 한 마디 한다.

"이젠 그만 좀 하세요."

같이 있을 날이 멀지 않았다면서, 그래서 함께 있어도 당신이 그리워지는 것 같다면서 어쩌면 그럴 수 있는지, 나는 그러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공연히 퉁명을 떨고, 아니할 말을 하고, 때로 화까지 내는 내 자신이 미워 죽겠다.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은 남은 걸까. 그리 못 돼 먹은 말을 내뱉곤 바로 후회한다. 반지르하니 참기름을 바른 김밥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꽉 멘 목으로 그걸 삼킨다. 눈물 간이 밴 김밥의 맛이 참 복잡하다.
#어머니 #김밥 #김장김치 #오이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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