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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리리야 닐리리" 아흔둘 어머니와 리듬 타는 아침

[두 여자가 같이, 다시 삽니다] 어머니와 산 지 두 달... 며칠밖에 안 된 것 같다는 어머니

등록 2021.02.06 11:20수정 2021.02.0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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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센타 갓다옴. 새해 첫날 내 나이 92세가 된다.'


2021년 1월 1일, 어머니의 일지 내용이다. 몇 년 전까지 어머니는 TV를 켜서 오늘의 날짜와 요일을 확인하곤 하셨다. 날짜를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교회를 가야 하는 날 등 날짜와 요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여전히 있었다.

일요일 낮 전국노래자랑, 평일 저녁 6시 내고향, 그리고 뉴스 등 항상 보시던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이것도 점점 줄어들어 TV를 켜는 일이 거의 없어져갔다. 그리고 오늘이 며칠인지도 점점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약 1년 전부터 탁상 달력에 매일 저녁마다 메모를 시작했다. 주로 '센터에 갔다옴'이나 '교회 가서 예배드림'을 써놓으신다. 달력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매일 기억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 자식들이 전화를 하거나 직접 와서 확인을 하고 쓰도록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책에 쓰시는 어머니의 하루 일과

새해가 되어 새 탁상달력을 보니 글을 쓸 수 있는 칸이 너무 작았다. 그래서 작은 공책을 마련해서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 한 달 가까이 공책에 일지를 쓰고 있는데, 일지를 기록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백지 상태처럼 전혀 기억이 없다기보다는 조금 흐릿하게 그리고 머리보다는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침대로 들어가기 전에 일지를 쓰도록 상기시켜주는 것, 그것이 내가 맡은 몫이다. 나도 아주 가끔씩은 잊어버려서 다음날 쓰는 경우도 있다.
 

어머니의 일지 나와 함께 산지 두달 되는 날, 어머니의 기록이다. 이 공책에 그날그날 어머니의 일상과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며 어머니의 하루가 마무리된다. ⓒ 이진순

 
탁상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서 오늘이 며칠이었는지를 확인하고, 공책을 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쓴다. 달력의 작은 공간이 아니라 공책을 사용하게 되고, 무엇에 대해 쓰면 좋을지에 대해 나와 옆에 앉아서 같이 이야기하다보니 일지의 내용이 작년보다 점점 길어지고 있다.

어머니와 두 달쯤 같이 살다보니 차츰 자연스럽게 하루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아침에 일어나서 씻은 다음 유튜브를 보면서 체조를 하고 있다. 물론 '치매예방체조', '인지기능향상운동' 등 어머니 맞춤형 운동을 선택했다.

나도 같이 체조를 하며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을 깨운다. '닐리리맘보', '무병장수가', '도라지타령', '누이' 등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노래들은 아니지만, 내가 부르거나 누군가가 부르는 걸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던 노래에 리듬을 맞추면서 나와 어머니의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들의 아침운동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이것저것 해보다가 얼마 전부터 아침 유튜브 체조를 시작했다. 보면서 열심히 따라하다가 무릎이 아프면 의자에 앉아서 약 15분간 몸을 움직인 후 따뜻한 보리차 한 잔 마시고 어머니는 센터에 가신다. ⓒ 이진순

 
나는 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요소 중 하나가 '리듬'이라고 언제부턴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중학교 때 좀 치다 그만둔 피아노와 기타에 대한 미련이 있고, 기회가 되면 밴드나 중창 같은 걸 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리듬이 나의 아침을 깨우고 있다. 조금은 웃음이 나오는 인연이다. 확실히 몸을 깨우기 위해 좀 오바다 싶게 동작을 하면서 그 인연에 호응하고 있는 중이다.

운동 후 따뜻한 보리차 한 잔 마시고나서 어머니는 2층에서 1층까지 걸어서 내려가고 나는 배웅을 한다. 이 공간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널랑 나오지 말라"라는 말을 종종 한다. "어머니 계단에서 푸더지카부댄(넘어질까봐)", 또는 "날씨가 어떤지 나도 한번 나가봐야지" 등의 말을 하면서 함께 나가서 차 타는 것을 지켜보고 들어온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둔 엄마의 일상이 대략 이런 것일까 싶다. 어머니가 나가시고 나면 집안일 조금 하고, 점심 챙겨 먹고 이것저것 할 일 하다보면 금세 어머니 오실 시간이 되어 있다.

얼마 전부터 어머니는 센터에서 돌아와 내가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책을 읽고 있다. 아흔 일곱 살 할머니가 30여 년간 쓴 일기를 정리한 <아흔 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책을 주로 읽는다. 보통 할머니가 아니라며 감탄하신다. 어떤 내용을 읽었는지 말해달라 하면 읽어가며 잊어버려서 설명은 못 하겠단다. 잊어버려도 읽는 순간 집중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6시 내고향, 뉴스 등 TV를 보면서, 땅콩도 까고 콩 고르기도 하면서 2~3시간 정도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일지를 쓰고 나면 어머니의 하루는 마무리된다. 처음에는 저녁을 먹고 나서 조금 있다 잠자러 들어가셨는데, 이젠 TV도 보고 일도 좀 하느라 1~2시간 취침 시간이 늦어졌다. 아침 8시쯤까지 그야말로 '푹잠'을 주무신다.

나는 어머니가 주무시는 밤 시간에 유튜브를 보면서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 유연성엔 나름 자신 있는 몸이었는데, 오랜 방치 끝에 막대기가 돼 있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늦거나 이러저런 핑계로 안 하는 날도 꽤 있지만, 굳어진 내 몸을 매일 밤 요가로 기분 좋게 풀어주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있다.

어머니와 같이 산 지 두 달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결정하면서 나는 무엇을 바란 것일까? 소소한 일상 속에서 간간이 떠오르는 질문이다. 내 삶에 대해 그리고 어머니의 삶에 대해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왔는지를 찬찬히 살피고 싶다. 이에 대해 답하기, 조만간 하려 하는 과제이다.

우리 둘이 같이 산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나랑 사니까 좋은지 안 좋은지를 어머니에게 물었다. 당연히 좋다길래 그럼 뭐가 제일 좋으냐 물으니 "근심걱정이 없지"라고 하셨다. 그럼 혼자 살 때는 근심걱정이 많았냐고 물으니 그때는 별로 집에 오고 싶지가 않았다고, 이젠 집에 오면 너가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고, 맛있는 것도 잘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하셨다.

두 달이 되던 날에는 우리가 같이 산 지 두 달이 되는 날이라고, 나랑 같이 살아서 좋은 점, 나쁜 점, 부탁할 점을 일지에 써달라고 했다.

'진순이하고 산 지 두 달이 되엇다는데 내 생각에는 몇일박에 안된 것 같다. 정말 유수같은 세월이구나. 행복하단 말박에 할것없다.'

1월 11일, 어머니의 기록이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제주 겨우살이를 하고 있다. 
#어머니 #노인체조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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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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