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아래서 태어난 도학자 최산두, 유희춘에게 학문 전수

미암일기와 함께 떠나는 조선 사림의 꿈과 일상 ⑤

등록 2021.01.25 17:26수정 2021.01.25 17:26
0
원고료로 응원
어느 시기나 학문과 문화 예술적 계보는 매우 중요하다. 그 계보 속에는 한 사람의 사상과 철학적 경향 또는 지향하는 이념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사림시대를 살다간 인물들을 보면 이러한 학문 계보가 뚜렷하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사림의 계보는 보통 고려 말 조선 초 왕조교체기 재야세력으로 밀려났던 정몽주에서 길재의 학통을 계승한 이른바 김종직 일파가 15세기 후반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형성되어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종직에서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특징을 보면 <소학>을 학문과 처신의 기본으로 삼고자 하였다. <소학>과 가례가 성리학적 실천윤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김종직이 선산과 밀양을 왕래하고 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이 일대에 사림파 인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거주하거나 수령으로 재임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유희춘 호남사림의 학맥 이어

미암 유희춘의 학문적 계보를 알기 위해서는 호남사림의 학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호남사림의 학맥은 조선 건국 이후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온 사대부 집안의 후예들로 연산군 대에 등장하여 중종반정 이후 크게 성장하였다.

호남의 학맥은 호남사림의 형성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명종 대에 서경덕과 이황, 조식학파가 형성되면서 호남사림 역시 이러한 학문 경향의 영향을 받거나 대응하면서 성장한 것이다.


유희춘은 김굉필에서 최산두로 이어지는 학문적 계열을 이어오는 한편 외조부인 최부로부터 아버지 유계린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두 계열 중에 최부 계열은 주로 해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재지사족 들로 이시기 다수의 사림이 해남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림들의 학문적 계보는 재지사족들의 주거지를 근거로 한 혼맥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해남지역 재지사족들이 해남정씨를 중심으로 혼맥 관계가 형성되듯이 해남정씨의 사위인 금남 최부를 중심으로 하여 학문적인 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암, 최산두의 문인이 되다

미암은 보통 최산두(1483~1536)와 김안국(1478~1543)의 문인으로 알려져 이들로부터 사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최산두와의 학문적 인연이 더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최산두는 미암의 형인 유성춘, 그리고 윤구와 함께 호남3걸로 일컬어지고 있다. 최산두는 유성춘, 윤구와도 학문적 교류를 하였을 것으로 보여 자연스럽게 문인의 관계가 맺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암의 성장과정을 보면 어릴 때는 아버지 유계린의 지도 아래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해남 대둔사와 영암 도갑사 등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세 무렵에는 최산두와 김안국에 학문을 배웠다고 하여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계보가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미암이 본격적으로 최산두로부터 사숙한 것은 최산두가 화순 동복에 유배와 있을 때로 이때 최산두는 기묘사화로 인해 동복에 유배와 있었다. 미암은 친구 김인후와 함께 이곳에서 최산두로부터 학문적인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백운산 아래서 성장한 최산두

사림들이 추구한 성리학적 세계관 속에는 자연을 향한 은둔사상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화와 이로 인한 유배 속에서 자연히 이러한 은둔사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화로 인해 세상을 등지고 자연 속에서 살고자 했던 당시 사림들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

미암의 학문적 스승이었던 신재 최산두는 백운산의 정기를 받고 광양 옥룡면에서 자라고 성장한 인물이다. 백운산(1222m)은 전남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세를 자랑하는 산으로 백운산 봉우리 중에 하나가 '신선대' 고 백운산 아래 마을 중에는 '선동(仙洞)'이라는 마을도 있어 자연 속에서 심신을 수련하며 성리학에 열중했던 당시 사림들의 세계관이 느껴진다.

옥룡면은 백운산 자락의 남쪽 입구에 자리 잡은 곳으로 백운산을 등지고 높고 낮은 산세가 좌우로 감싸고 있다. 제법 넓은 농토도 펼쳐져 있어 사람 살기에도 넉넉해 보인다. 백운산 들머리의 산수경관이 뛰어난 곳이어서 일찍이 신라 말 풍수사상의 비조로 알려진 도선국사가 옥룡사에서 35년간 주석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수도하며 살았던 옥룡사지는 터만 남아있지만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사이에도 광활한 동백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은 매우 푸근하고 안온하게 느껴진다. 도선국사가 기거한 곳이었으니 오죽 좋은 명당이었을까?
 

도선국사가 주석한 옥룡사지 산수가 수려한 백운산 아래는 풍수사상의 비조인 도선국사가 35년간 주석한 옥룡사지가 있다. ⓒ 정윤섭

 
인근에는 국문학의 최고봉이었던 고산 윤선도가 함경북도 삼수 유배지에서 이곳 옥룡면 추동마을로 이배와 79세부터 약 2년 1개월가량 지냈던 고산의 마지막 유배지이기도 하다.

최산두는 이곳 옥룡면 동곡마을에서 어릴 때 약 10여 년 동안 배움에 임했다고 한다. 최산두가 공부하였다는 '학사대(學士臺)'가 이 마을 옥룡천 계곡 건너 절벽에 세워져 있다. 백운산에서 흘러내린 옥룡천 계곡에 세워진 학사대는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도 잘 어울려 보인다.
 

광양 백운산 아래 학사대 백운산 아래서 태어난 도학자 최산두가 공부하였다는 학사대가 옥룡천 계곡에 있다. ⓒ 정윤섭

 
학사대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봉강면 부저마을에는 최산두의 묘역이 있다. 최산두는 초계최씨의 중시조로 중시조로서의 위상 때문인지 초계최씨 묘역을 보면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최산두 묘에서부터 위계질서에 의해 조성된 가계 묘역을 볼 수 있다.

최산두는 옛 광양읍 봉양사에 모셔져 있다. 이 일대에는 광양 향교가 있고 주변에 교육청과 여러 학교가 들어서 있다. 유림회관에는 매천 황헌비도 세워져 있다. 성리학(교육)에 임했던 사림들의 전통과 역사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다.
 

최산두가 모셔진 봉양사 광양 출신의 최산두는 김굉필의 학맥을 이어 미암 유희춘에게 학문을 전수한다. 봉양사 주변에는 향교를 비롯 교육청, 유림회관, 학교 등이 들어서 있어 광양의 역사와 전통이 느껴진다. ⓒ 정윤섭

 
최산두는 김종직으로부터 사림파의 계보를 이은 김굉필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김굉필의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굉필은 무오사화로 인해 함경도 회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를 와 있었는데 이때 순천과 가까운 광양에 있던 최산두가 김굉필을 찾아 학문을 익힌 것이다.

유희춘이 최산두가 동복에 유배와 있을 때 학문을 배운 것처럼 최산두도 김굉필이 순천에 유배 왔을 때 학문을 익힌다. 김굉필 역시 평안도 회천에 유배 갔을 때 그곳에서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수 받는다. 이를 보면 당시 사림들에게 유배지에서의 학문적 전승이 매우 중요한 계기였음을 알 수 있다.

김굉필은 순천 유배생활 동안 최산두를 비롯 여러 인물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데 유희춘의 아버지인 유계린도 계도하여 유계린 역시 김굉필의 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계린은 이곳 순천 태생으로 순천에 유배 온 김굉필로부터 학문을 전수 받은 것이다.

유희춘의 일가들은 유계린이 해남으로 이거해 온 이후에도 순천에 살고 있었다. 미암 유희춘은 전라도관찰사로 순행 도중 순천에 살고 있는 사촌동생 유영춘을 만난다.

'1571년 신미년 6월 23일

아침에 출발하여 30여 리를 행하여 보성의 정자천에 이르러 점심을 들었다. 물을 건너 순천의 곡도천에 이르러 또 물을 건넜다. 이날 모두 50여 리를 행하여 송광사에 이르니 순천부사와 창기들이 모두 지영을 했다. 내가 루에 오르니 유영춘(유희춘이 사촌동생)이 와서 반갑게 만나보았다.'


당시 사림들의 교유와 활동이 혈연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최산두 #백운산 #봉양사 #도선국사 #학사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