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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리 사람들 국채보상운동에 나서다

[동작민주올레-시즌2] 동작동 사람들 ①

등록 2021.01.22 13:43수정 2021.01.2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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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동은 1980년 서울 관악구로부터 분리한 동작구의 이름이 있게 한 동네이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에는 나루터가 발달하여 동작진, 또는 동재기나루로 불렸고, 동작진을 둘러싸고 있는 동네의 이름도 동작리가 되었다. 1936년 이곳이 경성에 편입되면서 일본식 이름인 동작정이 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동작동이 됐다.

그런데 동작동은 6·25 한국전쟁 이후 큰 변화를 겪는다.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의 전신인 국군묘지가 동작동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동작동의 절반이 군인묘지에 편입됐고, 그것도 모자라 1980년에는 동작대로 동편의 땅이 분리되어 강남구(지금은 서초구)에 편입되면서 동작동의 입지는 대폭 축소됐다.[기자말]
"독립운동을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한 동작리 사람들 1907년 당시 과천군 상북면 동작리 사람들 65명은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합 24원 55전의 성금을 모아 기탁하였다. ⓒ 대한매일신보사


2018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때 강제 징용을 당했던 여운택 외 3명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1997년부터 일본 오사카 법원에서 시작된 손해배상 소송에서 21년 만에 승소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고 이행하는 대신 "대한민국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2019년 7월부터 일부 반도체 소재 품목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2019년 내내 전국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일본제품 불매운동이었는데, 이는 112년 전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역할도 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의 이 운동은 전 국민의 주권 수호운동이었다.

이에 기탁되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같은 해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 한규설·양기탁 등을 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 원 이상이었다.

이 국채보상운동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에 국채를 갚기 위하여 국민의 약 25%가 자발적으로 벌인 모금 운동이라는 점, 이후 이 운동은 하나의 효시가 되어 중국(1909)·멕시코(1938)·베트남(1945)의 국채보상운동에도 영향을 끼친 점 등이 높이 평가되면서 국채보상운동기성회취지문을 비롯한 총 2475건의 기록물이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공식 지정되기도 했다.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 1907년 전국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로 1907년 2월 27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이다. ⓒ 대한매일신보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한 동작리 사람들

이 국채보상운동에 동작리 사람들도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동작리 사람들은 전 주사 길영식을 비롯한 65명의 이름으로 24원 55전을 대한매일신보사에 기탁한다. 리 단위에서 참여자의 숫자가 65명에 이르고 있는 점이 우선 놀랍다. 모금액의 규모도 리 단위를 기준으로 할 때 상당히 큰 규모에 해당한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4원 정도하던 시절이므로 24원 55전은 쌀 여섯 가마니가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이 항일운동에 조직적으로 나서는 첫 출발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동작리에서도 장복녀, 김덕순 등 여성의 이름이 여럿 등장하는 부분도 눈에 띈다. 동작리 사람들의 이러한 참여 현황은 <대한매일신보> 4월 14일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 운동을 적극 탄압하였다. 송병준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이 있었고,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목적한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정신은 물산장려운동 등을 거쳐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면서 다시 불붙은 2019년의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이어졌으니,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한복판에 있던 동작리 사람들을 다시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국채보상운동의 주도자 중 한 분인 양기탁이 안장되어 있어 1907년 당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했던 동작리 사람들의 열기를 항상 느끼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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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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