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김진숙 두고 나만 편할 수 없어" 30일째 굶고 있는 신부님

[김진숙 쾌유와 복직으로 가는 희망버스 ⑦] 시인 박일환이 만난 서영섭 신부

등록 2021.01.21 12:32수정 2021.01.21 12:32
1
원고료로 응원
 
a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중인 서영섭 신부(왼쪽) ⓒ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단

  
오늘(20일)로 무기한 단식 30일째.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재미있는 걸 찾아서 해봤는데 생각만큼 별로 재미가 없더란다. 한편으론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도 가져왔던 터라, 남들보다 늦은 나이지만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고 수도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해서 신부가 된 지 이제 막 십 년을 넘겼다. 한편으로 그 십 년은 길거리에서 사회적 약자나 노동자들과 함께한 시간이기도 했다.

신부 서품을 받은 뒤 부산에서 장애아동센터 일을 보고 있을 무렵 김진숙씨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신부 서품받고 나서 내 정체성과 관련해서 잠시 혼란이 있었어요. 내가 품고 있던 마음, 기대하던 것과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다가 한진중공업을 다녀오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세상 안에서 봉사하는 삶,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고 해 놓고 잠시 별거 아닌 걸로 흔들리고 있었구나 싶었는데요. 한진중공업 방문이 새롭게 마음을 다져가는 계기가 되었던 거죠."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해고된 노동자 가족의 호소를 듣고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장 앞으로 갔을 때 그를 맞이한 건 험악한 표정과 몸짓으로 을러대는 용역들이었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신부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존중은 받을 줄 알았는데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신부의 상징인 로만 칼라 같은 것쯤은 그들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갖 욕설과 협박부터 시작해 "네가 신부냐? 그러면 나는 부처다"와 같은 식의 비아냥이 쏟아졌다.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뒤에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다시는 그 앞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러 생각이 얽혀들었다. 아, 노동자들이 그동안 저렇게 당하면서 살아왔구나.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은 아직 멀었구나. 사람이 이윤의 도구로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찾아들면서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내게 됐다.

"김진숙에게 경외감 느껴"

김진숙씨를 직접 대면한 건 크레인에서 내려온 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이 놀랐어요. 저보다 더 수도자다운 기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싶으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죠. 저는 사실 매사에 부정적인 생각이 강한 편이거든요. 저는 김진숙씨처럼 웃으면서 투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 단식을 하면서도 분노와 같은 온갖 감정이 섞여 있어요. 자기 기분에 도취되는 게 아니라 어떤 희망을 일구고자 하는 명확함에 대한 낙관성이 상당히 부러웠어요. 그런 부분에서 경외심을 느꼈죠."

그 뒤로 서영섭 신부는 제주도 강정마을을 비롯해 송전탑 싸움을 하고 있는 밀양으로 가서 할머니들을 만나고, 쌍용차 해고 사태 때는 대한문 앞으로 가서 분향소를 철거하려는 경찰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 과정들 속에서 몇 차례나 연행당하고 기소되어 벌금형도 받았다. 약자와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노상 미사를 집전하는 등 길거리의 신부로 나서는가 하면 때로는 싸움꾼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는 동안에는 수련을 위해 머리를 짧게 깎아야 했다. 신부가 된 뒤에는 이전에 하던 대로 머리를 길렀다. 신부가 된 후에도 자유로운 영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기질을 잘 받아줄 수 있을 만한 곳을 일부러 찾아간 게 수평적이면서 형제적 관계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였다.
 
a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중인 서영섭 신부 ⓒ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단

 
그렇게 기르던 머리를 2014년에 스님처럼 완전히 밀었다. 쌍용차 해고자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앞둔 시점이었다. 올바른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뭔가라도 해야겠는데, 그렇다면 스스로 가장 아끼는 걸 바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판결은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면서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그렇게 법적으로는 끝났을지 몰라도 해고자 문제가 끝난 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쌍용차 모든 해고자가 빠짐없이 복직할 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첫인상은 헙수룩한 차림의 동네 아저씨 같았다. 청바지와 등산화에 두툼한 파카를 입고, 머리는 어깨를 덮을 만큼 기른 터라 신부라고 보일 만한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2018년에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모두 복직시키겠다는 발표가 난 다음에 밀었던 머리를 다시 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로만 칼라도 평상시에는 잘 하지 않고 다닌다. 신부가 꼭 근엄한 모습을 하고 다녀야 할 이유는 없지만, 동네 아저씨 같은 차림을 하고 다니는 데는 신부라고 해서 남들과 다른 특별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2011년에 한진중공업 앞에서 집회를 하는데 사복 경찰이 술을 마시고 와서 채증을 했어요. 제가 그걸 보고 공무 중에 그러면 되느냐고 따졌어요. 다음 날 영도경찰서에 전화해서 사과하라고 했더니 왜 사과를 해야 하냐며 뻗대더라고요. 그러다 내가 신부라는 신분을 밝히니까 비로소 사과하는 거예요. 일반인이었다면 사과를 안 했을 거예요. 신부라는 신분에는 분명히 그런 특권이 주어지고 있어요. 그런 특권을 내려놓고 싶었고, 똑같은 권리를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영섭 신부는 작년 12월 8일에 인천 부평 쪽으로 발령을 받아 사목 활동의 터를 옮겼다. 그곳에서 양로원 운영을 담당하며 영적 수행을 위한 평신도들의 단체인 재속프란시스코회의 영적 보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으론 사회연대 활동을 위한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청와대 앞 단식 농성장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와서 결합하고, 평상시에는 신부로서 주어진 역할을 하며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활동 단식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단식자들과 떨어져서 단식을 하고 있지만, 힘겨운 건 마찬가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든데 바삐 돌아다니면서 단식을 하느라 체력 소모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페이스북에 '새벽에 눈물 나도록 물 한 잔의 고마움을 느낀다'는 짤막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단식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지루해서 못할 것 같아요. 일단 주어진 오늘 하루부터 최선을 다해서 견디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가더라고요."

인천으로 오기 직전인 12월 6일에는 부산역에서 영도까지 오체투지를 했고, 그 후에도 여의도에서 청와대까지 오체투지 하는 행렬에 참여해서 함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몸을 엎드렸다. 그렇게 몸을 던져가며 김진숙씨의 복직을 위해 애쓰는 건 미안함과 절박함 때문이라고 했다.
 
a

오체투지중인 서영섭 신부 ⓒ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단

 
"노동자나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동정에서가 아니라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의한 건데 그런 걸 너무 생각 없이 누려온 거죠. 나만 편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산에 살 때는 더운 여름날에 에어컨을 안 켜는 식으로 생활했고요. 자신에게 엄격하면서 덜 누리고 싶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걸 누리고 있다는 생각에 더 미안했어요.

부산에서 다시 복직 투쟁을 시작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희망을 걸었어요. 정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당사자와 시민사회 쪽에서 움직이면 정부에서도 뭔가 해결의 움직임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닌 거예요. 사측과 합의가 무산되면서 정부도 발을 빼는 식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어요."


"노동존중이라는 일회성 언어 안 믿는다"

서영섭 신부는 촛불 정부라고 하는 현 정부의 노동 문제 접근에 대해 기대할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발표한 대통령 신년사도 읽어보지 않았단다.

"저는 노동존중이니 사람이 먼저니 하는 미사여구의 일회성 언어를 신뢰하지 않아요. 여기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시작할 때 시민사회 수석과 전화를 하는데, 침낭 하나 들이는 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원칙이라는 말밖에 안 해요. 그렇다면 원칙을 바꿔라, 박근혜 정부 때부터 그랬던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원칙을 바꿔서 적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말이 안 통해요. 옛날에 운동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청와대에 들어가 있지만 그냥 관료들이 됐고 영혼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a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중인 서영섭 신부(왼쪽) ⓒ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단

 
서영섭 신부는 1992년에 멕시코에서 열린 특별총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때 결의한 게 우리는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선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런 기조가 사회적 연대, 사회적 사랑의 방식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는 것도 그런 흐름 속에 있는 거라고 했다.

기업가들에게 노동자들은 언제든 정리의 대상일 뿐 상생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게 서영섭 신부의 판단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마저 노동자들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한겨울에 30일이 넘도록 청와대 앞에서 노숙 단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국가의 책임을 물으면서 해결의 주체로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가 대한문 앞에서 국가폭력을 생생하게 경험했거든요. 김진숙씨가 해고된 것도 국가폭력에 의한 거라고 생각해요. 경찰이 불법 연행을 해서 조사하고 고문하면서 불온한 이념을 가진 빨갱이 노동자로 낙인찍는 방식으로 국가 기관이 개입했어요. 그래서 4.3이나 5.18에 대해 사과를 한 것처럼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하고 해고된 노동자들에 대해 국가가 사과하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반쪽짜리로 전락해서 처리된 날에도 현장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들이 있잖아요.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하고, 그건 말로만 노동존중이라고 해서 실현되는 게 아니잖아요. 실질적인 대책을 내놔야 하고, 그럴 때 35년 동안 억울하게 해고자로 살아가야 하는 김진숙씨 같은 노동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봐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서영섭 신부는 자신이 본래 낯가림이 많은 편이라고 했다. 남들은 낯선 이와 친해지기 위해 같이 밥을 먹는다면 자신은 친해져야 같이 밥을 먹는 스타일이란다. 그래서 대한문 앞에 가거나 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사성이 없다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란다.

그런 성격의 신부가 길거리에서 강론을 하고, 때로는 경찰과 맞서 싸우며 고함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예수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야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도 낯가림을 지우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리란 것, 그게 예수님의 제자 된 도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오늘도 청와대 앞 단식 농성자들인 송경동 시인, 정홍형 전국금속노조 부산양산 수석부지부장,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우 권리찾기유니온 활동가(4.16연대 운영위원)는 한파와 맞서며 김진숙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우리 사회와 국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서영섭 신부가 매일 페이스북에 올리는, "위로와 평화의 성모님, 한진중공업 김진숙 마지막 해고 노동자를 비롯한 이 땅의 모든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문과 함께.
 
a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 농성 안내 포스터 ⓒ 김진숙 복직 촉구 단식단

 
#김진숙 #복직 #서영섭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3. 3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4. 4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