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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눈을 뽑고 새로운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부상 이후 마주한 '불편한' 세계...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벽을 없애기 위해선

등록 2021.01.20 16:03수정 2021.01.2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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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눈. ⓒ 정누리


티눈 다섯 개를 뽑았다. 발바닥을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펀 것처럼 반구(半球)의 홈이 생겼다. 5년 동안 숱하게 구두를 신고해왔던 레스토랑, 카페, 영화관 등의 알바. 하루 종일 3만 보 넘게 걸었던 배낭여행,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 조깅하는 취미. 이 나날이 모여 두툼한 굳은살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보를 10분만 걸어도 발바닥이 아플 지경이 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티눈을 제거하러 피부과에 갔다. 쇠꼬챙이로 발바닥을 뚫는 듯한 고통이었다. 5분간의 고통이 끝나고 뻥 뚫린 발바닥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핏물이 고인 상처는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나를 성가시게 했다.

문을 연 자취방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온 머리를 얼른 감고 싶었다. 그 순간, 발바닥 시술 부위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던 피부과 직원의 말이 생각났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그 종착역은 발바닥인데. 나는 할 수 없이 화장실 바닥에 수건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석고대죄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았다.

짧다면 짧을 15분이었는데, 척추가 시멘트처럼 굳어버린 것 같았다. 두둑거리는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서 있을 때도 최대한 상처 부위에 압력이 안 가게 하라는 직원의 말이 또 생각났다.

반대쪽 다리에 힘을 싣고 삐뚠 자세로 머리를 말렸다. 한 듯 안 한 듯 샤워를 끝내고 절뚝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아뿔싸, 전등을 안 껐다. 본가였다면 식구를 불러서 불을 꺼달라 부탁했겠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다. 나는 공포영화 링의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기어가 불을 끄고 잠에 들었다.

고작 발바닥에 구멍 하나 생겼을 뿐인데 

한 날은 엄마와 장을 보러 갔다. 우리 엄마 발걸음이 이렇게 빨랐던가. 평소처럼 팔짱을 끼고 걸었더니 나중엔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결국 토라진 나는 "엄마 천천히 좀 가"라며 볼멘소리를 냈다. 엄마는 놀라며 깜빡했다고 사과했다. 그리곤 나의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어주었는데, 그조차 마음이 삐뚤어졌는지 못마땅했다. 그냥 타인이 나에게 맞춰주지 않아도 내가 빨리 걸을 수 있는 발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도 삐걱거리는 허수아비처럼 어색하게 걸었다. 화장실은 멀게만 느껴지고,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제일 안심되는 시간이었다. 난 어떤 순간에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신체에 작은 흠집 하나 생겼다고 마음이 시든 봉우리처럼 쪼그라들었다. 구멍을 뚫은 것은 발바닥인데 내 마음까지 텅 비었다.
 

나사 ⓒ unsplash

 
문득 다리 한쪽이 약간 불편한 회사 동료가 떠올랐다. 현장에서 조형물을 설치하다 부상을 입어 작년에 수술을 하셨다고 들었다. 다른 직원은 주변 소음 때문에 요즘 귀가 잘 안 들린다며 인상을 찌푸렸고, 또 다른 직원은 작업실이 어두워서 눈에 힘을 주고 작업을 했더니 눈이 침침해졌다고 했다. 내가 개인적인 이유로 투덜거리기 이전부터 다양한 이유로 신체적인 불편함을 겪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며칠 뒤 그늘진 작업실에 공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보니 눈이 침침해졌다던 직원 분이 전등을 추가로 달아 달라고 회사에 주기적으로 요구하여 전등 4개를 새로 설치 중인 것이었다. 그전까지 불편함을 몰랐는데, 막상 전등을 설치하고 나니 작업실이 훨씬 밝아져 물건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직원은 회사가 미처 신경 쓰지 못 한 부분까지 사소한 것으로 넘기지 않고 시정을 요구하여 모든 이들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작업실에서 사무실로 가는 길에, 아무렇게 떨어져 있는 부속품 몇 개가 발에 채였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누군가의 이동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게 제자리에 치웠다. 내가 편리한 길이 남에게도 편리할 것이라는 작은 생각이었다.
 

눈길 블랙박스 영상 ⓒ 정누리

 
얼마 전 퇴근 길에는 눈이 거세게 내려 차가 미끄러졌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고 핸들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더니 가드레일을 통 박고 튕겨 나왔다. 시골길이라 인적이 드물었고, 가벼운 충돌이었기에 다행이었다. 문득 눈길에 휠체어는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휠체어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할 만큼 중요한 보조 도구일텐데, 눈 쌓인 큰길을 둘러보니 원래도 드물었던 휠체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미끄러운 눈길은 장애인의 이동에 더없이 큰 장벽일 것이다. 인터넷을 조사해보니 2016년에 학생발명전시회에서 이혜림 학생이 수상한 '휠체어 스노우체인'이라는 발명품이 있었다. 겨울철, 노약자들이 휠체어를 타면 미끄러질까봐 못 나오는 것을 보고 눈이 오는 겨울에도 외부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발명했다고 한다. 이것이 상용화되면 휠체어 뿐만 아니라 유아차나 리어카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장애인을 위해 실시한 행위가 보편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우리는 '연석 경사로 효과'라고 부른다. 1972년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서는 장애인들이 건물 입구에 설치된 연석에 시멘트를 들이붓는 사건이 있었다. 장애인의 이동을 막는 턱을 제거하라는 의미였다.

이후 연석을 망치로 부시는 등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결국, 연석을 제거하고 경사로를 설치했다. 이로 인해 휠체어 뿐만 아니라 유아차, 카트, 캐리어 등도 입구를 편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

미국의 발명가 그레이엄 벨은 청각장애인인 제자들 및 가족들에게 멀리서도 큰 목소리로 말을 전달할 수 있도록 전화기를 대중화시켰다. 한국의 공병우 박사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세벌식 타자기와 점자 타자기를 발명했다. 생각해보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장벽은 가게 앞의 연석만큼 낮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깎아낸 것은
 

연석경사로효과 ⓒ UX Collective

 
티눈을 제거한 지 보름 정도 지나니 새살이 올라왔다. 블랙홀 같이 깜깜했던 마음도 점점 밝아졌다. 막상 몸이 괜찮아지니 언제 그랬냐는 듯 불편함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티눈 제거 부위에 압력을 주지 않으려 발바닥의 다른 부분에 힘을 주었더니, 주변에 물집 비슷한 것이 새로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관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다시 티눈이 되어 나를 괴롭힐 것이다.

이 작은 상처 하나에도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작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 순간, 편해지는 것은 결국 내 몸 전체다. 발바닥이 나으면 그간 못 했던 운동도 할 수 있고, 운동을 하면 머리도 맑아지고, 허리에 힘이 생기니 사무실에서도 바른 자세로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눈도 덜 피로하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도 개운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깎아낸 것은 티눈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연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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