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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져는 있으나 끊어진, 이 다리의 슬픔

[세상을 잇는 다리] 이어져는 있으나 끊어진,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등록 2021.01.20 19:05수정 2021.01.2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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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않는 다리 우리네 시골 작은 개울을 건너주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다리 모습이다. 철근콘크리트(RC) 슬래브 다리로 추정되며, 콘크리트로 만든 양측 난간이 향수를 자아낸다. 다리 중간 북쪽과 남쪽의 유지보수 및 관리가 다른지 노면 상태가 확연히 차이나 보이는 게 이채롭다. ⓒ 경기 DMZ 비무장지대

 
이어져는 있으나, 끊긴 다리가 있다. 더구나 몇 번의 사건을 겪었고 이제 사용조차 하지 않는 잊힌 다리가 되었다. 바로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못할) 다리'다.

이 허름한 철근콘크리트(RC) 슬래브 다리는 남북 분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본디 다리가 갖는 상징성은 '이음'에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이 다리는 이미 죽어있는 다리라 할 만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이어야 할 다리임에는 분명하다.
 
널문리의 널다리
  

비무장지대(DMZ) 경기 파주에서 강원 고성까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 구간에 설치된 띠 모양의 완충지대다. 1953년 8월 휴전협정으로 설치되어, 수십년간 잘 보존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이런 이유로 통일 후 이 지대에 대한 활용방안이 조명되곤 한다. ⓒ 경기 DMZ 비무장지대

 
판문점은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의 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널문(板門)이란 이름이 붙은 마을이다. 한국전쟁 때까지 초가집 몇 채가 있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널문리 이름 유래가 '널빤지로 만든 나무 문'에서인지 '널다리'를 뜻하는 말에서 왔는지는 불분명하다. 개인적으론 후자에 손들고 싶다. 널빤지 문은 우리 가옥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연유로 마을 이름을 널문리로 삼았을 까닭은 미약해 보인다.
 
문을 하나의 통과와 소통지점으로 본다면, 널문이라는 의미로 보아 이곳에 제법 규모 있는 기다란 널다리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특별한 연유나 사정이 있지 않는 한, 한적한 곳에 마을을 상징할 만큼의 큰 랜드마크(Land-Mark)로 문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임진왜란 초기 도망치듯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이곳 백성들이 널빤지 문을 뜯어 임진강에 큰 널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마을 이름이 이 일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리를 '널문교(板門橋)'라 불렀다 한다. 하지만 널문리에서 임진강까지 거리는 상당하다. 여하간 한양∼개성 사이 중간 기착지였던 점만은 분명하다.

우리 땅 이름을 해석하는 일은, 그 땅의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 선조의 피난행렬이 이곳 널문리를 지났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임진강이건 공동경비구역 안쪽에 자리한 사천(砂川)이건, 어딘가에는 분명 널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판문(板門)은 널문리라 부르던 마을을, 그저 단조롭게 한문으로 바꿔 쓴 것에 불과하다. 한국전쟁 휴전회담 당시 중국협상단이 편의를 위해 붙인 이름이란 말도 전한다.
 
공동경비구역 안 돌아오지 않는 다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주변 다리 남측 경계초소 주변에서 바라 본 전경이다. 사진 우측 중간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보인다. ⓒ 경기 DMZ 비무장지대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걸려 있는 사천은 폭 50미터도 채 안 되는 하천이다. 다리의 정확한 길이나 폭원·높이를 확인할 순 없으나, 우리네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던 철근콘크리트 슬래브 다리로 판단된다. 본래 이름은 '널문다리'였다 전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배경 소품으로 등장한 다리이기도 하다.
  

휴전회담장 전경 1951년 부터 시작되어 1953년 8월까지 휴전회담이 열린 곳이다. 팔작지붕 목재로 지었다. 경계를 서고 있는 외국 병사 모습이 무척 생경하다. 대한민국은 전쟁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나 지금이나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51년 정식 휴전회담이 이곳으로부터 북쪽 500미터 지점에서 열린다. 처음엔 천막을 치고 시작한다. 그러다 목조건물로 바뀌게 된다. 휴전에 임박해 휴전선을 측량 해보니, 처음 회담 장소는 북한 땅에 속에 있었다. 그래서 500미터 동남 측으로 내려온다. 그 자리가 지금의 판문점으로 규모는 동서로 800미터, 남북으로 400미터다.
 
1년 9개월의 긴 회담을 지나, 1953년 7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이곳을 분기점으로 쌍방 간 약 9만6700여(UN군 포함) 명의 포로가 남북으로 갈라진다. 각자 소신으로, 혹은 강요로 엇갈려 버린 길이다. 포로들이 자기들만의 방향으로 길을 달리해 갈라서면서 이 다리를 건넌다. 그러면서 붙여진 이름 '돌아오지 않는(혹은 돌아오지 못할) 다리'가 되었다.
  

포로들이 벗어 던진 옷가지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라를 건너 북한으로 간 포로들이, 남한과 미국이 준 옷가지 등은 입을 수 없다며 벗어 던지고 간 모습이다. 이처럼 극단으로 경도된 소모적인 이념대립이 피차 간 수십 년을 적대관계에서 피폐하게 만들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2만2천여 명이다. 이들은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넘겨져 자유의사에 따라 행선지를 결정토록 하였다. 많은 포로들이 남북 어디도 아닌 중립국 행을 택한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이 부린 몽니는 유명한 일화다. 이승만은 휴전협정과 포로송환문제를 활용할 모종의 꿍꿍이가 있었다.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부린 꼼수다.
  

공산포로 도착 모습 북한으로 길을 선택한 포로들이 판문점에 도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이 다리를 건너 떠나간 후, 다리 이름을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 명명한다.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승만은 "한미방위조약 체결 전엔 휴전이 불가하고, 반공 애국동포를 북한에 보낼 수 없다"라고 선언한다. 휴전협상 중이던 1953년 6월 18일엔 영천·대구·논산·마산·부산·거제도 등지에 수용된, 소위 반공포로 3만7천여 명을 직권으로 석방시켜 버린다. 나아가 자기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협정 교섭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어떤 무기로 휴전협정을 중지시키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갖지 못한 무능한 무뢰배의 횡포를 보는 느낌이다.
 
이런 태도는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북한도 포로들을 재수용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미국이 부랴부랴 이승만을 달랜다. 그때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경제원조와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낸다.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관계에까지 두고두고 걸림돌로 작용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휴전 50여 년이 다가오는 2000년에 개봉되었다. 영화에서 중립국(스위스) 감독위원회 법무관인 소피 장(이영애 분) 소령의 아버지가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중립국 행을 택한 전쟁 포로였다. 50여 년이란 시간이 지났어도 냉전으로 갈라진 갈등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젊은 경비병들이 우연한 기회에 은밀하게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면서,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기 시작한다. 젊은 나이는 늘 창창울울하여 싱그럽다. 금세 형, 동생이 된다. 한 핏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세대 전 할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아픔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대를 이어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서로 왕래하던 다리가 끊기고
 
다리가 위치한 곳은 공동경비구역 안이다. 구역 서측,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사천을 동서로 잇고 있다. 분단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는 남북 간 군사들이 이 다리를 자유로이 왕래하고 있었다. 1976년 8월 이전까진 서로 담배와 초콜릿을 나누곤 한다.
 
1968년엔 납북되었던 푸에블루 호 선원 82명이, 1969년에는 납북되었던 KAL기 승객 39명이 이곳을 통해 송환된다. 이들의 송환은, 판문점이 남북이 공동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하나의 통로이거나 소통창구였음을 전 세계에 확인 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1971년 9월 20일부터 72년 8월 11일까지 25차례의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필두로, 이곳은 남북을 잇는 창구로 확실하게 자리매김 되었다. 말 그대로의 널문이자 널다리였던 것이다.
 
1976년 8월 18일. 이 다리 남측에서 북측방향 시야를 가리던 미루나무 가지 제거를 지휘하던 미군 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 당하는 '도끼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남북은 전쟁 일보직전의 긴장상태까지 빠져든다. 이때부터 공동경비구역 내에도 군사분계선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도 남북 간 군사들의 왕래가 분계선을 경계로 제한·금지된 것이다. 2018년까지 공동경비구역에서마저 극한의 대립이 지속되었다.
 
1989년 대학생 임수경이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 국내 권력기관과 수구언론은 서늘한 공안정국을 만들어 낸다. 반면 냉전체제가 해체되려는 조짐을 보이던 국제 여론은 이에 매우 고무적인 반응을 보인다. 임수경과 동행한 몇몇 종교인들이 판문점을 통해 남으로 내려온다.

1990년 들어 통일운동가와 종교인, 문학저술가 등의 방북이 뒤를 잇는다. 이때 이뤄진 방북 러시로 판문점은 다시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다. 냉전해체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하지만 여전히 분계선은 강고하다.
 
앞날을 향해 항시 열려 있는 널문으로
 
2018년 4월엔 남북정상이 이곳에서 만나 평화와 공존·공영, 전쟁종식을 얘기한다. 후속조치로 공동경비구역에서 무기를 철수하고, 다시 남북한 군사들이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2019년 6월엔 미국 대통령이 이곳에서 북한 최고 지도자를 만나 회담한다. 냉전 이후 최초이자 경계를 넘나든 꿈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널문의 이름에 어울리는 일들의 연속이다. 널문이 항시 넓게 열려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널문은 넓게 열린 문이며 서로를 잇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과 북조선인민공화국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만나, 같이 북쪽 땅에서 남쪽 땅으로 넘어오기 직전 모습이다. 이 회담을 기점으로 수차례 남북은 물론 북미회담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 남북정상회담준비위원회

 
그 이름에 걸맞는 평화행진이 항구적으로 계속되었으면 한다. 이 다리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빛과 평화의 바람이 불어올 수 있을까? 모든 무기가 보습으로 바뀌고, 꽁꽁 얼어붙은 생각과 몸뚱이가 봄바람에 얼음 녹 듯 녹아내릴 수 있을까? 이곳 판문점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모든 미움과 적대가 건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길로 새로운 희망과 평화가 밀물처럼 밀려와 우리 민족과 전 세계의 안녕과 번영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남북이 서로 만나 부둥켜안고, 서로를 확인하는 다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대와 경계가 아닌 '만남의 다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이음'이라는 상징, 소통과 왕래라는 다리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게 되는 날, 그런 날은 꼭 오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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