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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이에게 집을 내주었습니다

어린이집도 놀이터도 못 가는 아이와의 영역 싸움... 아이만의 세계를 인정한다는 것

등록 2021.01.16 17:27수정 2021.01.1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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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지 않은 지 두 달이 되어 간다. 온종일 아이와 붙어 있는 생활은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같다. 어른의 시간과 아이의 시간 사이, 어른의 취향과 아이의 취향 사이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어디까지 내어줄지 다툰다. 매일 매일 새로 시작하는 영역 싸움이다.

거실에는 4인용 소파가 있고, 큰 테이블 주위로 의자가 여섯 개 있다. 그런데도 제대로 앉을 자리 하나 없게 된 지 며칠이 지났다. 딸아이가 의자를 끌어다 자기만의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소파 앞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스툴을 올려 담을 쌓았다. 안으로는 가장자리를 따라 쿠션을 세우고 작은 담요를 깔고 자기네 집이라고 소개했다.
  

아이의 집 오늘도 아이는 자기만의 집에 들어가 놀이를 시작했다. ⓒ 김현진

 
처음에는 아이 한 명이 간신히 앉아 있을 만한 크기였는데 어느새 누울 수 있는 정도의 넓이로 확장되었다. 하루는 갑자기 집안이 조용해져 돌아보니 아이가 거기서 잠이 들어 있었다. "엄마, 너무 아늑해 보이지 않아?" 하고 자랑하던 아이는 자신이 만든 아늑함 속에 누워 있었다.

가족이 모두 모이는 주말,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을 보려고 소파 근처에 모여도 아이는 자기 집을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소파 모퉁이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TV를 보았고 밥을 먹을 때마다 의자를 내놓으라고 아이와 실랑이를 벌였다.

밤이면 제자리로 돌려 놓으라고 꾸짖었고 아이는 속상해 눈물을 흘렸다. 그런 날이 반복되자 나의 성화는 잦아들었다. 아이의 고집도 고집이지만, 어린이집을 갈 수 없고 놀이터에서 놀 수도 없는 아이에게 집이라도 내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눈이 내리고 한파가 지속되면서 하루 종일 한 번도 문 밖을 나서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아이는 매일 자기만의 집을 지었고 마음에 드는 인형이나 책, 장난감을 가지고 들어갔다. 나날이 그 집에 쌓이는 물건이 늘어갔다.

한숨을 쉬다가도 다행스러웠다. 집에서라도 아이가 놀이를 계속할 수 있어서. 그러니 어지럽혀진 거실에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의자와 이불, 쿠션과 베개가 뒤엉켜 있는 거실을 보면 심란해지기도 하지만 언젠가 이 놀이도 끝이 날 것이다.

물건들은 본래의 자리를 잃었지만 기발하고 재미난 쓰임새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집을 짓고 웃고 있는 아이처럼, 한 곳에 붙박여 있던 의자와 장롱에 잠들어 있던 담요들이 자리가 옮겨지고 새로운 역할이 주어져 즐거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저술가이자 비평가, 사상가였던 발터 벤야민도 말하지 않았던가. 아이들만이 알아보는 사물의 얼굴이 있다고.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아이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사물세계, 즉 커다란 세계 안에 있는 작은 세계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81쪽, '공사 현장' <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다 쓴 휴지심이나 과자가 담겨 있던 종이 박스, 뽁뽁이 포장지와 종이백, 플라스틱 통이나 빈 캔은 아이의 수집품이다. 휴지심과 종이백에는 그림을 그리고 온갖 박스와 빈 깡통을 모아 집안에 있는 모든 필기구를 나누어 담는다.

수납장 속에 있던 물건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고는 자기 가방과 책으로 채운다. 그릇장에 있는 컵과 잔의 위치를 뒤바꿔 놓기도 한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꺼내 물건을 재배치하고 다른 역할을 만들어주는 건 아이의 특기다.

익숙한 것에 길들여진 내 눈은 바뀐 모습이 뒤죽박죽 같아 어지럼증을 느낀다. 하지만 때로는 아이의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하고 뜻밖의 광경에 정겨워진다. 한 발 양보하면 아이는 집 안에서 무한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아이와 집에서 온 종일을 보낼 수밖에 없는 요즘, 생활에 바짝 조였던 나사를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거실을 어지럽힌 아이를 꾸짖는 대신 청소를 하루 건너뛰고, 소파를 차지하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아이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대신 작은 방으로 피신해 책을 읽는다.

어른의 시선으로 쓸고 닦고 조이던 일상은 해이해졌다. 아이의 상상력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는 멋진 변명을 찾아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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