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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떼 몰고 가서 신식무기 구입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10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단을 통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등록 2021.01.16 16:39수정 2021.01.1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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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역에서 둔병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백 명 병사들의 의식주부터 군사훈련까지 맡아서 해결해야 한다. 국가기관이 할 일을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최운산 형제들의 넉넉한 재산이 있음으로 가능해졌다. 여기에 최운산의 아내 김성녀의 헌신적인 노력이 따랐다. 

김성녀 여사는 청년 최명길이 독립투사 최운산으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하셨다. 그래서 부대원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부터 봉오동전투 실제 상황까지, 독립군들이 머무를 공간이 부족해 1915년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지었던 모든 역사를 다 설명해주실 수 있었다. 
 
최운산 장군이 독립군 본부인 저택 주위에 대규모 토성을 쌓을 때 강도를 높이기 위해 흙과 짚을 섞어 만든 것도 토성이 두께가 1m가 넘어 말을 타고 토성 위를 돌며 수비할 수 있었고, 이 토성의 사방 모서리에 높은 포대를 쌓아 대포를 배치한 것까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하게 알려준 분도 김성녀 여사였다. (주석 10)


최운산은 장작림 부대에 있을 때부터 현대식 병기에 관심을 가졌다. 전쟁놀이가 아닌 전쟁에서 이길려면 최소한 상대가 소지한 무기를 갖춰야했다. 그는 장작림 군벌부대에서 무기 구입의 루트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독립군부대를 창설하면서 자신의 목장에서 키운 소를 팔아 무기를 구입하였다. 

대규모 토지를 소유함에 따라 대규모 목장도 운영하였고, 곡물과 축산업으로 대(對)러시아 무역업을 하였다. 최운산 소유 목장의 소들은 무역 도시인 훈춘이나 장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는데 매회 수백 마리의 소 떼를 몰고 갔다고 한다. 이 소와 곡물은 러시아군의 식량으로 대량 납품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역활동을 바탕으로 최운산은 연해주를 넘나들며 연해주의 독립군들과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고 러시아제 무기를 구입하여 봉오동의 사병과 독립군들을 무장시켰다. (주석 11)


봉오동에서 훈춘이나 장춘 그리고 러시아령 해삼위는 수백리 길이다. 아무리 나라를 되찾고자 모여든 애국청년들이지만, 수 백 마리의 소떼를 몰고 마적이 날뛰는 험한 곳에 선뜻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최운산이 직접 나섰다. 그의 용맹과 총기술, 무술실력을 알기에 청년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함께 하였다. 
 
최운산의 무술 실력에 대한 여러 일화가 있다. 대규모 목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소를 팔 때는 훈춘이나 장춘까지 수백 마리의 소를 몰고 가야했다. 그런데 당시는 비적들이 횡행할 때였다. 한 번에 100마리 이상의 대규모 소떼가 이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적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는 소를 몰고 길을 떠나는 것 자체가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일이었다. 일꾼들은 최운산이 동반해야 비로소 안심하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무술의 대가인 그와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소를 몰고 길을 떠날 때 최운산은 허리에 박달망치와 단도를 찼다. 속에는 방탄조끼를 입고 긴 박달봉을 둘러매고 말에 올랐다. 
 
총을 쏘면 소가 놀라서 흩어질까 우려하여 총은 일부러 소지하지 않았다. 비적을 만나게 되면 귀신 같은 무술 실력으로 제압했다. 박달봉으로 기절시키거나 쫓아버렸고, 비록 비적이라 하더라도 가능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주석 12)


무기의 출처는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단을 통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주에서는 마적떼의 습격이 문제였지만 중ㆍ소국경 지역에서는 양국군의 관문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독립군의 무기 확보는 자금만 조달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또한 시베리아의 구입처에서 서북간도 등지의 독립군영까지 무기를 운반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것은 중ㆍ소 관헌의 엄중한 감시를 피하면서 비밀리에 무기가 거래, 운반되어야 하였기 때문에 독립군 측으로서는 무기 운송이 중요한 작전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소련측의 감시와 취재가 심하여 중ㆍ소 국경을 통과할 때에는 뇌물에 의한 관헌의 매수가 안 될 경우에는 죽음을 무릅쓴 운반작전이 전개되었다.
 
무기 운반 때에는 구입 무기의 종류와 수량에 따라 몇십 명에서 때로는, 3~4백 명의 체력이 강건한 독립군을 선발하여 유능한 수송지휘관이 이들을 인솔하고, 보통 1명이 2~3정의 무기와 그에 따른 탄약을 분담하여 삼삼오오 선후가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거리를 두면서 행진했다. 
 
그리고 중국 관헌과 중ㆍ소 국경을 통과할 때에는 도중 지나(支那) 관헌이 소재한 지방에 있어서는 힘써 우회하고, 또한 상황에 따라 금전을 제공하여 매수책을 써서 통과하고 있으나 독립군이 가장 고심하는 것은 러ㆍ중 국경의 통과이며, 금력 혹은 비상한 노력을 지불하는 상황이었다. (주석 13)


주석
10> 최성주, 앞의 책, 99~100쪽.
11> 앞의 책, 92쪽.
12> 앞의 책, 93~94쪽.
13> 윤병석, 『독립군사』, 137~138쪽, 지식산업사, 199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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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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