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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주인은 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리뷰] 영화 <비바리움>

21.01.06 16:22최종업데이트21.01.06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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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느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가. 애초에 주체성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가 맞긴 한가. 태어난 김에 사는 자연의 일부치고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인간은 거대한 부품 속 하나의 조형물에 지나지 않음에도 없는 희망과 행복을 만들어 평생 좇고 있는 건 아닐까.

로어칸 피네건의 영화 <비바리움>은 동화 속 괴담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음악으로 우리를 자극한다.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원색의 장소에 지극히 현실적인 남녀를 가둬두는 게 이 영화의 주요 플롯이다.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음악 또한 지나치게 경쾌하다. 과도하게 작위적인 공간에서 그곳을 탈피하려는 주인공들은 큰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영화는 말한다.

이게 바로 자연의 섭리라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감정적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 법칙 앞에서 우리가 품었던 희망과 꿈은 그저 낮잠을 자다 꾼 꿈에 불과한 것이라고.

내집마련의 꿈을 품고 부동산에 들른 젬마와 톰.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시작할 신혼생활에 부푼 커플은 어딘가 모르게 기괴한 부동산업자를 만나게 된다. '욘더'라는 독특한 마을로 그들을 소개한 중개인은 시종일관 감정없는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이 살게 될 9번 집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만 설명한다.

갑자기, 중개인은 사라진다. 어딘가로 솟았다고 해도 좋을만큼 실재와 부재 사이, 개연성따윈 없다.

젬마와 톰은 욘더안에 남게 되고 차를타고 외부로 나오려 시도하지만 계속해서 도착하는 곳은 9번 집 앞이다. 기이한 현상에 마을 곳곳을 뒤져보지만 사람 사는 흔적 따윈 없다. 줄곧 이상해 보였던 하늘엔 똑같은 모양을 한 구름만 즐비할뿐이다. 냄새도, 바람도, 심지어 날씨도 없다. 젬마와 톰은 욘더 속에 갇힌다.

수수께끼같은 공간 속에서 며칠이 지나고 식재료를 비롯한 수상한 박스 하나가 그들 집 앞에 놓인다. 열어보니, 갓난 아기 한 명이 놓여있다. 박스에 적힌 문구는, '아이를 키우면 풀어주겠다'라는 문구였다. 졸지에 그들은 누구의 핏줄인지도 모를 아이까지 떠안게 된다.

아이는 시간과 상관 없이 빠르게 자랐다. 보통 인간의 성장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조숙해졌고, 괴상한 목소리로 젬마와 톰이 하는 행동을 이따금씩 따라하곤 했다. 젬마를 엄마라고 불렀고, 젬마는 나는 너의 엄마가 아니라는 대답을 하는 것으로 대화를 다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톰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미스테리한 상황을 풀어보려 마당 어디쯤을 파보기로 한다. 매일같이 땅을 파며 이곳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지만 땅만 더 깊어질 뿐 나오는 것은 없다. 톰의 키를 두 척이나 훌쩍 넘길만큼 땅을 팠을 때, 그곳에 묻힌 시체가 나온다.

영화는 더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지고 어느새 아이는 성인이 된다.

젬마는 성인이 된 아이가 아무 감정 없이 로봇처럼 말하고 다니는 것에 겁을 먹게 된다. 자신들을 헤칠 것만 같지만 끝내 아이는 젬마와 톰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공포를 조장하진 않는다. 누가 주체인지 모를 느낌만 줄 뿐, 관찰하는 어느 누구도 감히 톰과 젬마가 집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톰은 체념하는 마음으로 땅을 파다가, 몸이 쇄약해지고 주변에 병원이나 약국도 없었기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죽게 된다.

아이는 죽은 톰을 그가 파 놓은 땅 속에 묻는다.

영화를 보면서 회귀와 환원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 초반부,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는 바람에 진짜 그 새집의 주인이었던 새는 떨어져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곤 새의 어미는 뻐꾸기 알이 자신의 새끼인줄 알고 평생을 자식처럼 키운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알과 자신의 알을 구별할 수 없게 하는 생존 능력이 있다. 이게 바로 자연이고, 그들만의 생존법칙일 것이다.

톰과 젬마는 자연 법칙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회귀를 잘 따르고 있다. 욘더라는 마을 속 어딘가를 자꾸 헤매지만 자신들의 집 앞으로 돌아오게 되고, 톰은 비밀을 풀려고 땅을 팠지만 결국 그곳에 본인이 묻힌다.

비단 새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자연 법칙의 일종으로 회귀되는 일부에 불과하다면, 아이도, 욘더도, 9번집도 잘못된 것은 없다. 그 순환을 바꿔보려는 젬마와 톰의 희망이 안타깝지만 헛될 뿐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어떤 존재로 상징화될 수 있을까. 젬마와 톰의 곁을 맴돌며 그들의 보육을 받고 자란, 시간과 무관하게 괴물같이 커버린 아이. 아마 자연 법칙 굴레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힘은 아니었을까. 우린 우리가 정한 룰이 아닌,
어느순간 법칙처럼 정해진 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욕망한다. 나만의 욕망이라 여겼던 것도 실은 자본주의 굴레 속에서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욕망일 가능성이 높다.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욕망과 그 욕망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젬마와 톰처럼 행복을 꿈꾸고 희망을 품지만 그 욕망에 의해 결국 땅 속에 묻히는 결과를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를 키우면 풀어준다는 박스 속 메시지는, 사실은 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키우면 키울수록 조숙해져가는 욕망. 그 앞에서 점점 피폐해져가는 인간의 모습. 이게 바로 자연 법칙의 수순이라면, 이렇게 사회화 된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은 없다고 영화는 말할 수 있을까. 욕망에 의해 죽게 되는 결말이지만 그런 욕망이 없다면 거대한 자연의 틀 속에서 부품처럼 늙어죽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환영받는 삶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마저도 우리 것이 아니라면 삶은 너무 무력해질 것이다.

그런 질문을 던진 뒤 영화는 자취를 감춘다. 예쁜 동화 속 마을처럼 구름도, 풍경도, 냄새도 바뀌지 않는 테라리움 속에 우리를 가둔 뒤 홀연히 떠난다. 무엇이 맞고 틀리냐의 질문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삶의 법칙. 우린 그 중에서 어떤 동물이 될 것인가. 그 또한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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