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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독자가 무슨 소용, '빨갱이 자식' 꼬리표 달렸는데...

한국전쟁 장흥군 보도연맹사건 유족 김경수... 호적도 없어 뇌물주고 만들어

등록 2021.01.16 17:39수정 2021.01.1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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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리 앞바다(득량만). 장흥군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당한 곳이다. ⓒ 박만순

 
1967년 어느날. 쌀 두 가마 반을 마루 위에 쌓아 놓은 김경수(당시 18세)는 날아갈 것 같았다. '드디어 나도 호적이 생긴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입이 귀에 걸렸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쓰는데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옆집 사는 아저씨가 "경수 뭔 좋은 일 있나?"라고 묻자, 김경수는 "그냥 그런 일 있어요"라고 답했다. 왠지 좋은 일을 말하면 운이 날아까 봐 걱정이 됐다.

안방에 들어간 김경수는 작은아버지와 함께 아침상을 받았다. 아침상이라고 해봐야 된장국에다 김치와 밥이 전부였다.

"작은 아버지, 저 호적 만들어주씨오." "뭔 돈으로?" "지가 1년 동안 받은 새경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구만요. 마루에 쌀이 있승께 만들어 주씨오." 방문을 열어 쌀가마를 본 작은아버지 박형용은 "글씨다. 쩌거로 될랑가 모르겄다" 했지만 경수는 "아무튼 애써 봐 주씨오"라고 했다.

2년 급여를 뇌물로 바쳐 호적 만들어

그런데 왜 김경수는 18세가 되도록 호적이 없었을까? 그리고 왜 작은아버지는 성이 다른 박씨였을까?

김경수의 아버지 김남철은 혼인신고를 못한 상태에서 일찍 죽었다. 김경수는 출생신고도 안 됐고 때문에 호적이 없었다. 그리고 김남철은 2대 독자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다. 김남철의 어머니 이인겸이 새 남편 사이에 낳은 자식이 박형용이었다. 그러니 조카 김경수와는 성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면사무소를 몇 차례 드나든 박형용이 김경수를 불렀다. "야야. 비용이 모자란단다. 아쉽지만 다음에 해보자" "...." 그 말을 들은 김경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1년 동안 머슴살이 한 결과가 물거픔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경수가 호적을 만들 수 있었던 때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968년에서였다. 나이 열아홉이 되어서야 호적이 생긴 것이다. 고향에서 1년 동안 머슴살이 한 새경으로도 모자라 18세에 인천 간석동 채석장에 취업해 받은 1년 월급을 고스란히 바치고서야 호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뒤늦게 아버지 김남철의 혼인신고를 하고, 자신의 출생신고에 이어 아버지의 사망신고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의 웃기면서도 슬픈 현실이었다.

어린 아기 놓고 떠난 어머니

1950년 7월. 추순심은 아침 일찍 도시락을 준비해 장흥경찰서로 발걸음을 향했다. 며칠 전 전남 장흥군 안양면 안양지서 경찰에게 연행된 남편 김남철이 장흥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경수 아버지, 몸은 괜찮으세요?" "내는 괜찮응께, 애기나 잘 돌보소." 김남철은 아내의 등 뒤에 업혀 있는 아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남편과 애절한 눈빛만 교환한 추순심은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한숨만 쉬었다.

다음날 그녀가 장흥경찰서에 갔을 때 유치장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을 비롯한 장흥 보도연맹원들이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득량만)에서 수장되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전쟁 직후 전남 장흥군 득량만에서만 수십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불법 학살되었다. 

추순심은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시어머니 이인겸, 올케와 함께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장흥 바닷가를 헤맸다. 득량만과 남포, 상발리, 죽청, 고마리, 장안도 등을 15일이나 다녔다. 한 번 집에서 나가면 바닷가와 섬을 다니다 4~5일 만에야 돌아왔다. 그러기를 3~4차례 했지만 그 어디에도 김남철의 시신은 없었다.

남편이 없는 집에서 추순심이 지내는 것은 고통이었다. 시어머니도 있었고, 남편과 성이 다른 시동생(박형용)과 한집에 사는 것이 만만치는 않았다. 결국 추순심은 어린 아들 경수를 놓고 집을 떠나갔다. 김경수가 태어난 지 10개월 되었을 때였다.

1949년 김남철·추순심 부부는 결혼은 했지만 혼인신고도 못한 상태에서 아들 김경수를 낳았고, 그 와중에 김남철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되었다. 추순심은 집을 떠났고, 남은 아기는 호적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가 되어서야 2년 치 급여를 뇌물로 주고 호적을 만들 수 있었다.

섬으로 쌀 팔러 다닌 3대 독자

장흥군 안양면 해창리 덕동에서 1년 동안 머슴생활을 한 김경수는 쌀 가게에 취직했다. 배에 쌀을 싣고 장흥군 일대 섬으로 가져가 뱃머리에 하역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하루에 쌀 40~50가마를 메고 나르다 보면 저녁에는 파김치가 되었다. 쌀 한 가마니가 80kg이었을 때다.

이 일을 몇 달 하고는 인천으로 갔다. 초등학교를 나온 그로서는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장흥군 안양면 안양동초등학교를 다니는둥 마는둥 했다. 작은아버지가 사친회비를 주면 가고, 안주면 안 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중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기는 했었다. 15세 때 본인 앞으로 있던 논 3마지기(600평, 1,980㎡)를 작은아버지에게 주고 "상급학교를 보내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숙부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러면 나무는 누가 하냐?" 가슴을 치는 숙부의 말에 김경수는 진학을 포기했다.

인천 채석장에서 일을 할 때는 하루에 3~4번 코피를 쏟았다. 잡석을 트럭에 싣는 것이 그의 일이었는데, 18세 청소년이 하기에는 고된 일이었다. 그가 채석장 중노동을 참아낸 것은 '호적' 만들 돈을 모으겠다는 일념에서였다.

호적이 생겼다고 달라질 건 그닥 없었다. 그저 뿌리가 생겼다는 의미 하나였다. 채석장을 그만둔 김경수는 인천 월미도에서 노가다(막일)를 했다. 갯벌에서 종일 지게를 지는 일이었다. 아침에 지게를 지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서울시경 내사계 책상을 뒤엎어

"뭐라고요! 지가 독일에 못 가는 이유가 뭡니까?" "심사 내역을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뚜뚜뚜'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끊자 수화기에서는 '뚜'하는 소리만 들렸다.

김경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는 서독에 가기 위해 태권도 3단 자격증을 땄다. '빨갱이 자식' 소리 듣지 않는 나라에서 살려고 이를 악물고 태권도를 배운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서울시경 내사계로 달려가 담당자에게 항의했다. "당신은 신원조회에 걸려 안 돼요."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면 빨갱이지, 내가 뭔 죄요!" 김경수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사무실 책상을 엎고 의자를 던졌다. 이후 유치장에 구금됐지만 사연을 들은 경찰이 그를 훈방 처리해 주었다.

꽉 막힌 세상의 탈출구로 꿈꾸던 독일행이 좌절되자 그는 '병 걸린 닭' 신세가 되었다. 모든 일에 힘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에는 장사가 없는 법. 인천의 일터와 길거리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던 김경수는 옆 테이블과 시비에 휘말렸다. 친구 차씨가 흠씬 두드려 맞자 화가 난 김경수는 이단옆차기로 상대방을 때려눕혔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조직폭력배였다. 친구 차씨는 조직폭력배들에게 안 죽을 만큼 두드려맞았고, 김경수는 일주일을 도망 다닌 끝에 그들에게 잡혔다.

16:1였다. 16:1로 싸운 게 아니라 열여섯 명에게 김경수가 집단구타를 당했다. 아무리 태권도 유단자라도 조직폭력배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새벽 3시까지 맞은 김경수는 턱이 흔들리고 걸을 수도 없었다. 쓰러진 그에게 폭력배가 "너 내일도 맞을래, 우리 조직 들어올래?"라고 물었다. 젊은 나이에 맞아 죽기는 싫었다. 결국 그는 '검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폭력 세계에 몸담은 김경수는 무전취식과 금품갈취, 패싸움을 일삼았다. 그리고 한 패싸움에서 가슴과 허벅지에 칼을 맞고 인천 석바위파출소에 연행됐다. 그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탈출했다. 그때부터 검은 세계를 영원히 떠났다.

평생 집 짓는 일을 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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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자 김경수 ⓒ 박만순

 
고향에 내려 온 김경수는 한때 태권도 사범을 했다. 그러다 벽돌 찍는 일을 시작했고 집 짓는 일까지 하게 됐다. 벽돌, 미장(페인트칠), 집수리 등 전천후 기술자가 되어 칠십이 넘은 지금도 집수리 사업을 한다.

그의 남은 꿈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다. 아버지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고, 아버지라 불러 본 기억도 없다. 하지만 자신을 있게 해준 아버지의 존재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김경수는 아버지 김남철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득량만 물고기 밥이 된 이유를 알고 싶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호적 #득량만 #국민보도연맹 #태권도 #집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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