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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그는 왜 자신의 지식을 숨겼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토일드라마 <철인왕후>

20.12.26 13:35최종업데이트20.12.2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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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 tvN



tvN 토일드라마 <철인왕후> 속의 철종은 대중매체에서 형성된 이미지가 아닌, 실제 역사 속의 이미지에 좀더 근접해 있다. 드라마 속의 철종은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고, 책을 멀리하지 않는다. 물론 드라마 스토리는 허구이지만, 그런 이미지만큼은 실제 사실에 부합한다. 이 드라마 속의 철종은 대중매체에서 형성된 '까막눈 강화도령'과는 분명히 거리가 멀다.
 
까막눈 이미지는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 의해서도 조장됐지만, 그런 매체의 영향을 받은 역사학자나 역사 저술가들에 의해서도 한층 더 확산됐다. 그런 이미지가 확산되기 쉬웠던 것은 몰락한 왕족인 철종이 강화도에서 가난하게 생활을 한 데다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똑똑했다면 허수아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념이 까막눈 이미지를 강화시킨 측면이 있다.
 
사실, '허수아비가 되고 안 되고'가 지적 능력과 항상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외교 전문가인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군부의 허수아비가 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지적 능력보다는 정치적 자산이 허수아비가 되고 안 되고를 더 많이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까막눈 이미지가 후세의 대중매체에 의해서만 조장된 것은 아니다. 즉위 당시 만 18세였던 철종 자신에 의해서도 조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철종 자신이 한동안 '가방끈' 짧은 사람처럼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헌종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난 음력 헌종 15년 6월 6일(양력 1849년 7월 25일), '강화도에 가서 철종을 모셔오라'는 왕실 명령을 받은 영의정급 신하가 있다. 90년 생애를 일기로 기록한 <경산일록>의 저자인 정원용(1783~1873)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죽기 며칠 전까지 일기를 쓴 정원용은 만 19세 이후의 인생은 그날그날 일기에 담고, 그 이전 인생은 기억을 더듬어 기록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철저히 기록하면서 살아갔던 것이다.
 
헌종이 죽은 음력 6월 6일부터 철종이 즉위한 음력 6월 9일(양력 7월 28일)까지 철종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한 정원용은 그런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항상 기록을 염두에 두며 꼼꼼히 관찰하는 인물이 즉위 당시의 철종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던 것이다.
 

강화도에서 한양으로 떠나는 철종의 행렬을 묘사한 <강화행렬도>. 강화역사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경산일록>에 따르면, 당시 56세였던 정원용이 주의를 기울인 것 중 하나는 철종의 지적 상태였다. 왕실과 조정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몰락한 왕족의 지적 능력을 그는 고도로 관찰했다. 왕족이지만 역모죄에 휘말려 강화도로 유배 간 집안인데다가 경제적으로도 빈한했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정원용은 과거시험에 일찍 급제한 수재였다. 평균보다 17년 정도 빠른 만 19세에 과거시험 최종 단계인 대과에 급제했다. 그만한 학문적 능력을 보유한 그가 철종을 관찰한 뒤 내린 결론은 '자질은 우수하지만 배움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음력 6월 9일자 <경산일록>에 따르면 정원용은 왕실에 보고하는 자리에서 철종의 학문을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 엎드려 살펴보니, 자질은 훌륭하시지만, 본댁(본저·本邸)에 계실 때 필시 학문을 연마하시는 공력을 기울이지 않으셨을 겁니다. 성주(盛籌)가 19세라고 하시지만, 학문은 충년(沖年, 열 살 전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공부를 등한히 하는 학생을 듣기 좋게 격려할 때 하는 말이 '얘는 소질은 있는데, 공부를 안 해"라는 말이다. 철종에 대한 정원용의 평가도 비슷했다. 소질은 있지만 공부를 안 해서 10세 정도의 지식밖에 없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정원용이 그렇게 평가하게 된 데는 철종 자신도 한몫을 했다. 가방끈이 짧은 사람인 듯이 스스로를 소개했던 것이다. 즉위식 직전에 왕실 어른과 대신들을 대할 때도 철종은 그렇게 행동했다. 책을 어느 정도 읽으셨느냐는 질문에 대해 <통감>과 <소학> 일부를 읽었다고 한 뒤 "근년에는 읽은 게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통감>은 기원전 403년부터 서기 960년까지의 중국 역사를 담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축약한 <통감절요>다. 그리고 <소학>은 아동용 유학 교재다. 대궐에 도착하기 전에도 정원용이 끊임없이 학업 상태를 체크했기 때문에, 그때도 <통감>과 <소학>을 좀 읽었다는 식으로 답했을 수 있다. 그래서 정원용이 '학문은 충년과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하게 됐을 것이다.
 
즉위식 직전에 나온 그 발언을 신하들은 겸양의 표시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짜로 믿었던 것 같다. 이 점은 "근년에는 읽은 게 없습니다"라는 발언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서 나타난다. 철종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향후의 학습 방향을 지도하면서 <사기>부터 읽을 것을 제안했다. 역사부터 공부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 tvN

 
조선시대 신하들은 군주에게 역사서보다는 유교 경전을 더 많이 추천했다.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 마음 수양도 되고 유교적 가치관도 함양하게 되어 유학자 출신 신하들과 호흡을 맞추기 쉬울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군주가 역사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권력의 이치에 통달하게 되어 자신들이 다루기 힘들어질 거라는 게 신하들의 우려였다. 신하들은 세상물정을 너무 잘 아는 군주를 경계했다. 그래서 역사서보다는 경전을 더 많이 추천했던 것이다.
 
그런데 즉위식을 앞둔 철종에게 신하들은 역사서부터 읽으라고 제안했다. 유교 경전을 배우기 전에 세상물정부터 배워야 할 청년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신하들이 철종을 낮게 평가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날 철종이 보여준 모습은 쇼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은 그로부터 6년 뒤 철종을 만난 면암 최익현의 기록에서 드러난다. 1855년인 이 해에 만 21세였던 최익현은 훗날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떠오른다. 이때 성균관 유생이었던 최익현의 눈에 포착된 철종은 웬만한 유생들은 범접할 수 없는 상당한 학식의 소유자였다.
 
최익현 문집인 <면암선생문집> 연보 편에 따르면, 1855년 봄에 최익현은 우수한 성균관 유생들만 응시하는 춘도기(春到記)라는 특별 과거시험을 치렀다. 이날 시험장에 나온 만 23세의 철종은 단순히 참관만 한 게 아니라 직접 문제를 내고 채점까지 했다. 철종은 유생들을 일대일로 마주한 자리에서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에서 문제를 내고 즉석에서 채점을 했다.
 
그런데 시험시간 내내 철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위 문집은 "임금께서 즐겁지 않은 기색"이었다고 말한다. 유생들의 답변이 철종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철종의 표정을 단번에 바꾼 것이 마지막 수험생인 최익현의 등장이었다. 최익현이 막힘없이 술술 답변하자 철종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철종은 "순통(順通)이로다"라며 우수 판정을 내렸다.
 
만 18세에 10세 전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불과 6년 뒤인 만 23세에 우수 성균관 유생들을 지도할 정도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최고의 엘리트 유생들에게 직접 문제를 내고 답변을 들으며 인상이 구겨지는 모습은 그들을 가르칠 만한 단계에 도달한 사람한테서나 나올 수 있다.
 
이는 1849년 당시의 철종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1855년의 일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즉위 당시에 철종이 보여준 모습이 쇼에 불과했음을 뜻한다. 왕실과 대신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거짓 행동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왕위에 무사히 즉위하기 위해 거짓 연출을 했던 것이다. 철종보다 38세 많은 정원용이 그런 연출에 속아 사람을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철종의 까막눈 이미지는 실제 역사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 <철인왕후> 속의 철종은 그렇게 동떨어지지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철인왕후 철종 강화도령 정원용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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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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