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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호두파이, 디퓨저... 캐나다에도 '마음'이 배달되고 있네요

만날 수 없지만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 덕분에 꽤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 같습니다

등록 2020.12.24 07:39수정 2020.12.24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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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전해줄 손뜨개 수세미와 아기 드레스 ⓒ 김수진

 
'아무리 빨라도 하나에 이십 분은 걸리니까 여덟 집에 두 개씩 돌리려면 다섯 시간 이십 분….'


이렇게 계산은 해놨지만 "배고프다, 도미노 쓰러뜨리는 거 보러 와라, 뚜껑이 안 열린다" 이어지는 아이들의 요구에 응하다 보니 시간은 자꾸 늘어난다. 그래도 틈틈이 손을 놀려 빨강 초록 크리스마스 빛깔로 하나둘 완성되어가는 손뜨개 수세미를 보면서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수세미와 홈메이드 피클을 예쁜 가방에 담아 크리스마스 전날 남편과 산타가 되어볼 예정이다.

친척과 멀리 떨어져 사는 이민자들에게는 가까운 친구들이 곧 가족이다. 캐나다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말이면 으레 한 집에 모여 음식과 농담과 마음을 나누던 친구들이 있다. 예년 같으면 크리스마스 계획을 짠다는 핑계로 벌써 몇 번은 만나 왁자지껄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들 이렇게 말할 뿐이다. "이렇게 조용한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야."

'한가닥 실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맞이한 연말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고 아이들과 트리를 꾸민 지 이미 오래고, 집 앞마당에 있는 나무에 불도 밝혔다. 아이들은 특별하고 맛있는 걸 먹자며 메뉴 고민에 한창이고, 그런 아이들 몰래 선물도 다 준비해놨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우리끼리만' 누려야 한다. 따스하기만 하던 '가족끼리'란 말에 찬바람이 휑 하고 지나간다.

며칠 전에는 <오마이뉴스> 기사 제목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정은경 "고령 환자 마지막 성탄절 되지 않으려면…"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잖아! 고령에 기저질환자인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막상 기사를 읽어보니, 제목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의 당부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감염 경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선행 확진자와의 접촉, 그중에서도 가족에게서 감염되는 경우가 가장 많다 하니,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고령의 가족을 우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바이러스가 퍼지기 쉬운 동절기인데다 연말연시로 모임이 늘어날 수 있는 시기니 더욱 그러했다. 일일 확진자 수천 명을 오르내리는 코로나 2차 유행의 시기, 어떤 심정으로 자극적으로 들릴 수 있는 표현까지 동원하며 '단합된 멈춤과 대면모임 행사 취소'를 권고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캐나다도 심각한 수준이다. 11월 말부터 매일 6000명 대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고 23일 현재 총 확진자는 52만 명을 넘어섰다. 현 상황을 한 감염병 전문가는 "한가닥 실에 매달려 있다"고 표현했다.

코로나 2차 유행이 시작되자 온타리오주에서는 1차 유행 때처럼 일시에 전면적인 락다운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를 5단계로 세분해 적용해오고 있다. 규제가 가장 많이 완화돼 있는 초록 단계에서부터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그리고 필수업종을 제외한 전면적 봉쇄 단계인 마지막 회색 단계로 구분된다.

규제를 강화하자니 경제가 악화되고, 규제를 완화하자니 바이러스 확산이 우려되는 전 세계적 딜레마를 그렇게라도 조금이나마 극복해보려 안간힘을 써왔지만, 회색 단계인 봉쇄에 들어가는 지역이 점차 늘어났다. 그러던 중, 결국 오는 26일부터 온타리오주 전체가 봉쇄에 돌입한다는 발표가 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에서는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끼리만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혼자 사는 경우라면 다른 한 가정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큰 모임은 피할 것, 집에서 떨어져 사는 대학생들의 경우 집에 돌아가기 전 10일에서 14일 간 자가격리하는 방안을 고려할 것, 온라인 가상모임으로 대체할 것 등의 세부 지침도 뒤따른다.

퀘벡주의 경우, 6명까지 모임을 허락하되 모임 전후로 한 주씩 자가격리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학교와 직장은 물론 필수품 구입을 위한 외출까지 자제한 채 자가격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데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의미를 지닐지도 의문이다.

기사를 보니, 크리스마스 연휴 전에 증상이 없더라도 미리 테스트를 받겠다는 사람들도 꽤 있는 모양이다. 음성이 나오면 마음 편히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일 테지만, 그 또한 테스트 받을 당시의 결과일 뿐이라 믿을 만한 안전장치는 못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이들과 연휴를 함께 하고픈 이들의 바람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는 방법 

캐나다인들에게 크리스마스란 한국의 추석과 비견될 만한 일 년 중 가장 큰 연휴다. 이 시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선물을 주고 받고 쌓인 이야기와 음식을 나눈다. 지난 추석 친지 방문 자제를 요구했을 때 많은 이들이 쓸쓸한 명절을 보내야 했듯, 이곳의 크리스마스 역시 전에 없는 '가혹한 크리스마스'로 기억될 것이다.

코로나라는 잔인한 바이러스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짓눌러놓은 한 해가 가고 있다. 시공간을 공유한 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래로 흥겨웠을 연말연시가 숨죽인 듯 조용히 지나간다.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물리적 거리를 갈라놓았다. 그러나 한편, 마음의 거리만은 벌어지지 않도록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가 닿기 위한 발상 또한 함께 자란 듯하다.

팬데믹 초기 이탈리아 등지의 유럽에서는 '발코니 음악회'가 열리곤 했다. 코로나로 집안에 갇힌 사람이 발코니에 나와 악기를 연주한다. 그 소리에 이끌린 이들이 또 다른 악기를 들고 나와 연주에 합류한다. 몸은 각자의 발코니에 서 있지만, 서로의 연주가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 그렇게 위로를 주고받는 감동적인 '플래시 몹'이 탄생한다.

목줄에 달린 작은 병에 주인이 넣어준 메시지를 담아 이웃에게 전한 뒤 답장을 받아 돌아오곤 하는 '고양이 메신저'의 이야기도 읽은 적이 있다. 고양이 메신저 덕에 코로나로 집안에만 갇혀 있던 두 이웃의 삶에 온기가 퍼졌다.

며칠 전에는 그야말로 '웃픈' 기사를 접했다. 코로나로 장장 11개월을 아들과 만나지 못한 부모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집을 찾은 아들의 자가격리를 위해 특별한 장치를 마련했다. 아들이 지하 공간에 따로 머물면 간단했겠지만, 아들을 외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 부모는 거실과 응접실에 천장까지 닿도록 투명 가림막을 설치했다. 서로를 품에 안아볼 수는 없었지만 투명 가림막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며 식사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격리기간을 견뎠다.

지난 5월에 읽었던 기사도 생각난다. 구엘프라는 도시의 한 소년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너무나 걱정된 나머지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집 밖을 나서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해 뒷마당에도 나가지 않았다.

아들의 염려를 덜어주기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엄마는 시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거리두기만 잘 지킨다면 산책 정도는 괜찮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아들에게 보내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지만, 시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년의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메일로는 어조를 전할 수 없으니 직접 만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엄마와 소년을 더 놀라게 한 건, 집 문 앞에 멀찍이 떨어져 선 시장의 손에 소년에게 건넬 '코로나19 공동체 영웅' 증서가 들려 있었단 사실이다. 규칙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토록 잘 지켜준 데 대한 고마움의 증서였다. 한 시민의 부탁에 귀 기울이고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시장의 따뜻함으로 인해 걱정 많던 소년은 '코로나 영웅'이 되었다.

인도에 초크로 예쁜 그림을 그려 넣어 이웃을 위로해준 어린이들, 지역 사업체를 지원한 기업가들, 코로나 최전선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창문에 감사의 표시를 붙여놓은 아이들 등 십여 명에게도 이미 '영웅 증서'가 발급된 상태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지인들에게서 속속 배달되고 있는 마음의 선물들 ⓒ 김수진

 
너나없이 지치고 힘든 코로나 시기, 우리 가족에게도 요즘 매일같이 마음이 배달돼오고 있다. 예년처럼 빨간색 테이블보 깔고 초 켜고 떠들썩한 웃음 나눌 수 없으니 오히려 마음을 전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분주하다. 

얼마 전엔 이웃에 사는 부부가 눈처럼 하얀 케이크를 전해주었고, 그제는 남편과 함께 일하는 분께서 아이들 주라며 호두파이를 구워 보내셨다. 어제는 친한 언니가 디퓨저를, 한 지인은 쌀을 한 포대 주고 가셨다. 오늘도 눈사람 그려진 예쁜 가방에 마음 하나가 배달됐다.

내일은 남편과 내가 마음을 전할 차례. 손뜨개 수세미와 아는 꼬맹이에게 선물할 빨간 드레스는 완성됐다. 이제 오이랑 양배추랑 당근을 썰어 새콤달콤 피클을 담아야겠다. 집집마다 돌며 재빨리 전해준 뒤 혹은 문 앞에 놓아둔 뒤 마스크 위로 눈인사만 나누고 돌아서야겠지만, 그 잠깐의 만남과 나눔으로 잠시 따뜻해질 수 있다면, 이번 크리스마스가 조금 덜 가혹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코로나19 #크리스마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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