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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만안교는 정조대왕 때문에 만들어졌다

[세상을 잇는 다리] 을묘능행, 역사의 파도를 넘어 정조대왕이 건넌 다리 ③

등록 2020.12.09 16:42수정 2020.12.0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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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행 2일차, 만안교를 건너다
 

시흥행궁 터 추정지 행행 1일차 행렬이 하루밤을 보낸 시흥행궁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서을 금천구 시흥5동이다. 시흥현 관아가 있었다고도 하고, 선정을 베푼 현령을 기리는 비석이 있어 비석거리로 부르는 곳이다. 주변에 수령 800년이 넘은 은행나무 3그루가 있다. ⓒ 이영천

 
둘째 날 시흥행궁을 나서, 대박산 벌판(석수역)을 지난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염불교(안양유원지입구) - 만안교 - 안양참 앞 길(안양역 인근)'이라 기록한다. 염불교 위치는 삼막천(경인교대 길)과 삼성천(안양유원지 길)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행행은 삼막천을 우회하여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염불교(현 만안삼성교 부근)를 건너 남행한다.

만안교(안양교 4거리에서 1980년 도로확장으로 삼막천 상류로 460m 이전)를 만난다. 만안교는 안양천을 건너는 다리다. 7경간 무지개다리다. 이토록 다(多) 경간인 무지개다리는 그리 흔치 않다. 축조 당시엔 5경간이었다고 다리 옆 만안교비는 전한다. 비석은 다리길이가 15장, 폭이 4장, 높이가 3장이라 기록한다. 언제 7경간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만안교 전경 당초 안양교 4거리에 있던 다리를 1980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이곳 삼막천으로 이전하여 옮겼다. 7경간 무지개다리다. 1795년 음력 7월 축조시엔 5경간이었다고 다리 옆 만안교비는 전한다. 다리에서 정조대왕 치세의 당당하고 힘찬 자신감과 기술이 엿보인다. ⓒ 이영천

 
만안교는 순전히 정조대왕 때문에 만들어진 다리다. 왕의 잦은 능행으로, 임시 가교인 나무다리를 철거하고 영구적인 무지개다리를 놓았다. 1795년 7월(음력) 경기감사 서유방(徐有防)이 불과 3개월 만에 만들어낸다. 따라서 을묘능행 때 5경간 무지개다리를 건너지는 않았다. 왕은 이듬해엔 안양에 만안제(萬安堤)를 쌓는다. 농업용수공급은 물론 홍수대비용 둑이면서 10리 길을 닦는다. 오늘날 국도1호선과 시흥대로 모체가 된다.


지반을 단단히 보강하였다. 다진 지반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같은 크기의 선단석 한 칸을 더 올린다. 이런 효과로 무지개가 길쭉하게 도드라져 높아 보인다. 이는 지대석과 선단석이 부린 요술이다. 물살이 부딪치는 곳을 마름모꼴로 깎아 물의 저항을 줄인다. 선단석에서부터 정교한 무지개를 짜 나간다. 아마도 같은 지보공을 활용해 7개 무지개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가운데 무지개가 다른 무지개 보다 약간 높고 넓다. 시각적인 안정감이 돋보인다. 다리 가운데를 살짝 높여 전체적으로 완만한 타원형이다. 
 

만안교 세부 높은 기단석 위에 유사한 높이의 선단석을 돋워 올린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런 효과로 무지개가 길쭉하게 높아 보인다. 정밀한 당시 기술이 눈 앞에 선하다. 당당하고 늠름해서 더 믿음직 스럽다. ⓒ 이영천

 
무지개 상단 부형무사석을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 귀틀돌 역할을 하게 했다. 상판은 2열 우물마루를 깔았다. 청판석은 길이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다리는 길이 31.2m, 너비 8m, 높이 6m의 비교적 길고 큰 다리다. 조선후기 정조대왕 치세의 넘치는 자신감과 패기 있는 교량기술이 안양 만안교에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당당하고 늠름하다.

안양참 앞길을 지난 행렬은 장산모퉁이를 돌아, 군포천교를 건넌다. 군포천의 위치나 흔적, 기록이 없어 명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다만, '안양천이 학의천과 만나기 전 상류를 군포천이라 불렀다(1872년 지방지도 과천현 편)'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렴풋한 위치 추청만 가능할 뿐이다. 안양교도소 부근 호계동 일원으로 추측한다. 그곳에서 안양천을 건넜을 것이다.

위치 미상의 서원천교를 건너, 의왕 맑은내들(청천평)에 이르러 서면천교를 건넌다. 이곳에서 원동천(의왕 성라자로마을 앞 오전동)을 지나 사근평(경수대로 의왕중학교 인근), 사근참(의왕시청별관), 사근참 행궁(의왕시 고천동 주민센터 부근)에 다다른다. 사근참 행궁에서 둘째 날 점심을 먹는다.

행궁을 나와 현 국도1호선과 북수원IC가 만난는 부근 지지대고개(미륵현, 현 효행기념관)를 넘어 괴목정에서 쉼을 하고 다리를 건넌다. 괴목정은 괴목(槐木), 즉 회화나무가 있는 정자다. 괴목정 다리는 지지대와 노송지대 사이, 서호천 상류인 영동고속도로 부근으로 추정된다. 괴목정 다리를 건너 용두(노송지대 입구)를 지나, 진목정(장안구 만석거 공원 부근) 다리(영화천을 잇는 다리)를 지난다. 이제 장안문이 눈앞이다.

행행 행렬이 드디어 장안문에 든다. 화성 축조가 시작된 지 1년 2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장안문은 이미 완성 되어 있었으나, 성벽 곳곳이 공사 중이다. 장안문에서 대로를 따라 남측 팔달문 쪽으로 향하다, 중간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화성행궁으로 든다. 드디어 63km 행행길이 이틀 만에 끝이 난 것이다.


조선 최고의 신도시 화성에 이르러
 

화성 정문(북문) 장안문 장안문 옹성 위에서 남측으로 바라 본 모습이다. 저 무지개 틀 아래로 행행이 지나갔다. 1794년 9월에 완공하였다. 특이하게 북문이 정문 역할을 하도록 기능을 부여한 것은 정조대왕이 의도한 것이다. 이는 한양과 화성의 위상과 관계가 있다. ⓒ 이영천

 
정조는 화성에서 여러 행사를 연다. 향교에 배향한다. 현지에서 과거시험도 치른다.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을 참배한다. 성곽 쌓는 일을 친히 살피기도 한다.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을 동원한 야간 군사훈련도 실시한다. 수구세력들에게 너그러운 손을 내민다. 같이 갈 길을 열어 놓는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연다. 백성들에게 쌀을 내려 위무한다. 나이든 백성들을 위해 경로잔치도 베풀어 준다.

이중 화성에서 이틀째(윤 2월 12일) 시행한 야간훈련이 돋보인다. 오전엔 아버지 묘인 현륭원을 참배한다. 그리고 오후에 군사훈련을 시행한다. 왕이 신시 초각(오후 4시 15분경)에 말을 타고 행궁을 나선다. 장대(화성 서장대)에 오른다. 한양에 묵은 때처럼 덕지덕지 끼어있는 수구세력을 향한 시위다. 왕이 명령을 내린다. 북과 나팔, 명금(징, 나(鑼) 또는 바라를 쳐 울림)이 울린다. 장대하다. 뒤이어 하늘을 뒤흔드는 함성이 울린다. 큰 위엄이 서린다.
 

서장대 전경 화성 가장 높은 곳 팔달산 정상에 있는 장대다. 이곳에서 군사와 관련된 총괄지휘본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 서면 화성 성곽 전체 조망이 가능하다. ⓒ 이영천

 
뒤이어 포성이 울리며 포가 불을 뿜는다. 사방에서 총이 타당탕 터진다. 낭기대포혈(예전 성곽 벽에 대포를 쏘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이 분주하다. 조총과 신포(신호용으로 쓰던 화포)소리가 연이어 울리고, 삼안총(조선 후기, 세 개의 포신을 겹쳐 만든 작은 포)이 겹겹으로 터진다. 천지가 진동한다. 그 위용에 신하들이 한편으론 환호성을 지르고, 한편으론 두려움에 움츠러든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화성 성벽을 빙 둘러 횃불이 올라온다. 장관이다.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모양새다. 성 안 백성들 집 대문에도 모두 등불이 켜진다. 온 도시가 환하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처럼 불꽃이 환하게 타오른다. 야간에도 군사훈련이 시행된다. 총과 화포가 불을 뿜는다.

훈련은 르네상스로 융성하는 조선의 위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왕은 고생한 군사들에게 상을 내린다. 무과별시에 응할 기회를 부여한다. 군사들 사기는 드높기만 하고, 수구세력은 한껏 움츠러든다. 화성행행 핵심명분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이다. 진찬례(進饌禮)를 윤 2월 13일에 행궁 봉수당에서 치른다.
 

화성 행궁 행행의 최종 목적지다. 1789년 576칸으로 건립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낙남헌 외 모든 전각이 사라지고 오랜 기간 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화성 축조 200주년을 기념하여 시민들이 뜻을 모아 복원을 추진, 482칸으로 2003년 일반에 공개 되기에 이르렀다. ⓒ 이영천

 
화성에서 마지막 날(1795년 윤 2월 14일)에는 장안문 주변 성곽과 화홍문, 방화수류정을 둘러본다. 성곽 조성이 막바지로 치닫던 길을 따라 움직였으리라. 화홍문은 누각다리이자 수문(水門)이며, 성곽(군사시설)이다.

한양 동대문에 있는 오간수문(五間水門), 이간수문(二間水門)과 유사한 기능이다. 화홍문도 만안교와 같이 7경간 무지개다리다. 7개 무지개 중 맨 가운데가 조금 높고 넓다. 주변과의 조화와 상징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다. 화홍문 축조방식은 만안교와 유사하다. 같은 기술진에 의해 만들어졌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문루 위에는 멋진 한옥정자를 얹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양쪽으로 오르내리는 곳은 계단참을 두었다. 군 지휘소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쉼 보다는 방어기능 위주의 군사시설로 만든 정자다. 그 아래로는 사시사철 물이 흐른다. 광교산에서 발원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원천(대천) 물이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북쪽에 있는 수문으로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남으로 흘러가는 곳에 놓인 수문이다. 화홍문이라 부른다. 7경간 무지개다리이며 누각이 있고, 군사적인 성곽기능까지 갖춘 복합시설이다. 사진 우측 상단으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 이영천

 

방화수류정 정조 때 만들어진 정자로, 창덕궁 부용정과 더불어 최고의 정자로 꼽는다. 亞(아)자형을 기본으로 사진 좌측에 일자모양 정자를 덧대어 전체적으로 ‘ㄴ’자 모양이다. 성곽 밖 인공연못 용지(龍池)와 화홍문, 방화수류정이 이루는 풍광은 일품이다. 멀리 까지 조망이 가능해, 군사지휘소로도 손색이 없다. ⓒ 이영천


화홍문을 지나 언덕이 있는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방화수류정이 나온다. 우리나라 정자 중, 창덕궁 부용정과 더불어 최고의 정자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모두 정조 때 만들어진 정자들이다. 두 정자 모두 亞(아)자형을 기본으로 한다. 방화수류정은 亞형에 일자를 덧대어, 전체적으로 'ㄴ'자 모양을 하였다.

성곽 밖에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 용지(龍池)는 화홍문, 방화수류정과 어울려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방화수류정에 오르면 먼 곳까지 조망이 가능해, 군사적인 지휘소로도 손색이 없다. 정조는 이곳에서 용지를 바라보며, 조선 르네상스라는 웅지의 꿈을 꾸었으리라.

정조의 을묘능행은 많은 것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과 민본정신을 세상에 널리 알린다. 여기에 더하여 많은 유물도 남긴다. 화성이 첫째다. 화성 남북으로 팔달문과 장안문을 만들어 낸다. 곳곳에 만든 여러 문과 옹성, 성곽, 치, 돈대, 정자와 수문을 남긴다. 모두 그 자체로 하나씩 떼어놓아도 보물이다.

여기에 더하여 둘째 만안교와 같은 훌륭한 다리와 한강을 건넌 획기적인 배다리(舟橋)를 남겨두었다.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다. 역대 어느 왕이 이런 발상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 이 모든 것을 기록(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으로 남겨 후세에 전한다.
 

화성능행도병풍(5)-서장대야조도 화성 당도 2일차(윤 2월 12일) 화성 전역에서 친위대인 장용영을 동원하여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한 모습을 그렸다. 서정대가 우뚝서고 그 아래 행궁이 있다. 성벽 곳곳에 횃불을 밝혔고, 성 안 민가에도 불을 밝혀 온 도시가 환하다. 조선 중흥의 기상이 엿 보인다. ⓒ 국립고궁박물관

 
그의 죽음엔 많은 의혹이 있다. 그의 죽음으로, 기득권세력은 역사를 반동으로 몰아갔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의 이른 죽음으로, 반동으로 변해버린 1800년대가 무척 아쉽다. 세도정치로 막을 연 한 세기가 세도정치로 망국의 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정조가 건넌 다리들이 좀 더 발전해 교통과 물산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거래되었다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소통이 활발해지고 물산이 빨라지고, 생각이 넓어져 지식이 쌓이면서 우린 좀 더 부강한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1795년 윤 2월 16일 한강을 건넌 정조 배다리 그림(漢江舟橋還御圖)은 지금 우리에게 역사의 강을 올곧게 건너라 손짓한다. 거센 역사의 물결을 건널 힘을, 부디 그림에서라도 얻어내는 슬기와 지혜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만안교 #장안문 #서장대야조도 #화홍문 #방화수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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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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