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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이 짐승 총질하듯... 길 가던 주민 죽인 나주경찰부대

해남읍 평동리 민간인학살 생존자 김경예가 말하는 '피 내음' 그날

등록 2020.12.12 19:11수정 2020.12.1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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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대전 골령골 민간인학살 자료 사진. ⓒ 심규상

 
"막둥아, 엄마 있냐?" "예."

1950년 7월 25일. 이웃집에 사는 해남경찰서 고 형사가 식전에 찾아와 김경예의 어머니 김문신을 찾았다. 무슨 얘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김문신은 딸 김경예(당시 17세)에게 "막둥아, 느그 오빠 데려온나"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김경예는 해남읍 해리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고 있던 오빠 김재수(당시 35세로 추정)에게 달려가 평동리 본가로 데려왔다. 집에서 기다리던 고 형사는 김재수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 속닥였다. 그날 오후였다.

"막둥아, 느그 오빠 점심 차려라." 김경예가 고봉밥과 김치를 개다리소반에 얹는 찰라에 나주경찰부대원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군화를 신은 채 무턱대고 안방에 들어갔다. "가자!" 어머니 김문순과 오빠 김재수가 엉겹결에 떠밀려 나왔다. 김경예가 뒤쫓아 가자 김문순은 "막둥아, 느그 오빠 신이나 갖고 온나"라고 했다. 김재수는 경찰의 총구에 떠밀리느라 신발도 신지 못했다.

차마 변소통에는 못 들어가겠더마

김경예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신발을 챙겨 몸을 돌리는 순간, "탕"하는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설마!'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김경예는 어머니가 있던 곳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엔 오빠가 없었다. 다만 오빠가 서있던 자리에는 핏자국만이 보였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진 김문순이 입을 떼려는 순간 "탕" 소리가 이어졌다. 김문순이 총을 맞고 고꾸라진 게 먼저인지, 김경예가 정신이 나가 쓰러진 게 먼저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잠시 후 김경예가 눈을 뜨니 "우리는 아무 죄가 없어라"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탕 탕." 금속 파열음 소리는 귀를 찢는 듯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김경예는 가까운 집으로 무작정 뛰었다. 고 형사 집이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몸을 피할 곳을 찾았다. 아궁이에 머리를 집어 넣었는데 몸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를 빼니 검댕이가 떨어졌다. 뒤꼍으로 갔다. 장작더미가 있어 그 사이로 들어가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금속 파열음은 계속됐다. "탕 탕 탕." 동네 사람들이 쓰러지며 피를 토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어디로 숨어야 안전할까, 합수통(변소의 방언)에 들어갈까.' 김경예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합수통에는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고 형사 집 담을 넘어 앞 못 보는 할머니 집에 갔다. 헛간으로 가서 가마니를 뒤집어썼다. "성님!"하며 이웃집 할머니가 앞 못 보는 할머니 집에 뛰어들었다. "어따 어따, 우리 아군이라 안하요." 총을 쏜 이가 아군(나주경찰부대)이라는 말이었다.

한바탕 총 소나기가 지나가고 마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김경예도 거리로 나왔다. 일부 사람들도 태극기를 머리 위로 들고 고양이 발걸음을 하고 나왔다.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김경예는 어머니와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친구 덕예네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거기에 염라대왕 같은 나주경찰부대원이 있는 게 아닌가. 덕예 아버지가 작은소리로 뭐라뭐라 중얼거리자 총을 든 경찰이 "더 크게!"라고 외쳤다. 덕예 아버지의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와 "탕"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다. 덕예 아버지는 해남 읍내에서 상을 팔고 고치 가게를 하던 이였다.

해남경찰이 부산으로 후퇴한 지 이틀 만인 1950년 7월 25일의 일이었다.

나주경찰부대원의 고향은 화를 면해
 

충북 보은군 내북면 일대에서 발견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의 유해(자료사진). ⓒ 박만순

 
이날 해남읍에 진주한 나주경찰부대는 외관상으로 인민군인지 대한민국 군·경인지가 불분명했다. 소속을 알 수 있는 견장, 버클, 군모, 복장 등 주요 부분을 가리고 북한 말투를 썼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나주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나주경찰부대원 100여명은 쓰리쿼터와 트럭 10대에 나누어 타고 해남읍내 곳곳을 다니며 '피의 살육제'를 벌였다. 하루 동안 90여 명이 학살됐다.

해남 주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주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한 몇몇 사람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주민들은 무차별 사격의 대상이 되었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성인 남성이 주 타깃이었다. 

당시 나주경찰부대원은 소부대로 나뉘어 해남군 소재 각 면으로 이동했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 화내리에서는 주민 2명이 사살되었다. 나주경찰부대 트럭이 마을로 진주하자, 이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주민 30~40명이 환영을 하기 위해 모였다. 이들은 6명이 해남경찰서로 연행됐고 이중 2명이 학살됐다.

나주경찰부대가 완도로 이동하면서 해남군 현산면 일평리를 지날 때였다. 경찰부대를 도로에서 마주친 주민 3명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길가 개울에 머리를 쳐박았다. 나주경찰부대가 총을 쏘아 그들을 벌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다. 경찰은 주민들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그저 총질을 했다. 사냥꾼이 지나가는 짐승에게 총질한 격이다.

이 와중에도 놀랍게도 피해를 전혀 보지 않은 마을이 있었다. 바로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였다. 당시 이 마을에는 인민군을 환영한다며 주민 20여명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을까? 이날 진주한 나주경찰부대원 중에 남창리가 고향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찰은 "아재들요, 언능 들어가씨오"라며 등을 떠밀었고 경찰 지휘자에게는 "여기 무식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한 것잉께 용서해 주이소"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눈감아 주어 남창리에서는 단 한 명의 피해자도 나오지 않았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공포의식'의 내면화

왜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으로 위장해 해남지역 주민을 학살했을까? 일제 강점기 해남군에는 '해남소작인회' 등 농민조직이 결성, 1930년대에는 소작쟁의 운동과 혁명적 농민운동이 활발했다. 또 1930년대 전라남도 최대의 조직사건인 '전남운동협의회'가 해남군 북평면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해방 후에는 '해남군 인민위원회'와 '농민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미 군정도 진주 초기에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장 김정수를 초대 해남군수로 임명했다. 그런데 1946년 11월 11일 일어난 '해남추수봉기'를 기점으로 미 군정은 좌익진영과 농민운동세력을 탄압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해남의 농민운동 세력과 진보진영을 싹쓸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을 일일이 찾아내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해남경찰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독립운동가와 농민운동 세력을 1차 싹쓸이를 했다. 이후 나주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해 2차 싹쓸이를 했다.

싹쓸이를 하면서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이나 그렇지 않은 주민도 '빨갱이'로 몰아붙여 죽였다. 두 번의 광풍을 겪은 해남 주민들은 '빨갱이'라는 말 앞에는 입도 뻥끗 못했다. 공포의식이 내면화돼 이후 반백 년 동안 피해의식에 젖어 살게 되었다.

손녀에게 젖을 물린 할아버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김경예가 구정물을 얻어 와 돼지우리에 쏟아부었을 때였다. 방문 창호지에 조카를 안은 아버지의 모습이 비쳤다. 잠시 후 김경예가 방문을 여는데 아버지가 조카(죽은 김재수의 딸)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게 아닌가.

집 나이 세 살짜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젖을 물린 것이다. 젖은 나오지 않았지만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애기는 할아버지의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 모습에 김경예는 눈물이 핑 돌았다. 3개월 전 오빠가 총에 맞은 날이 또 떠올랐다. 총에 맞은 오빠 김재수를 아버지 김영두와 이웃집 아저씨가 업어와 마루에 눕혔다.

오빠의 배에서는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김경예는 마루 닦는 걸레로 오빠의 가슴과 배를 닦았다. 걸레는 금세 피로 얼룩졌다. 냇가에 가 피 묻은 걸레를 빠는데, 냇물에 오빠의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김경예는 울음이 터졌다.

김경예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평생 갔는데 특히 걸레로 오빠의 몸을 닦을 때 났던 피 냄새는 무척 오래 갔다. 나중에 시집을 간 그녀가 마루를 닦는데 갑자기 피 냄새가 '확' 났다. 그만 김경예는 정신줄을 놓았다. 그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오빠 김재수가 학살된 지 얼마 후였다. 올케 언니가 개가를 했다. 7세, 5세, 3세가 된 조카가 3명이나 있었다. 김영두는 며느리에게 "그래 가거라. 다만 경찰한테만은 시집 가지 말거라"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며느리는 개가했다. 7세 아들은 해남고아원에 맡겨졌고, 둘째 아들과 막내 딸은 김영두의 차남이 맡아 키웠다. 둘째 자식에게 손녀를 맡기기 전 김영두는 손녀가 칭얼대면 나오지 않는 자신의 젖을 물렸다.

오빠가 학살된 곳이 지척
 

증언자 김경예. 김씨가 서있는 곳인 70년 전 엄마와 오빠가 학살된 현장이다. ⓒ 박만순

 
어느덧 87세가 된 김경예(전남 해남군 해남읍)는 70년 전 학살된 엄마와 오빠를 잊을 수가 없다. 그날을 생각하면, 해남경찰서 고 형사가 엄마와 오빠에게 "피난 가라"고 귀띔을 했지만, '아무 죄도 없는데 피난은 뭐하러 가나'라는 생각에 화를 당했다고 김경예는 생각한다. 

엄마와 오빠가 총 맞은 자리는 지금 그녀가 사는 집에서 불과 1km에 있다. 시장을 오다가다 맞닥뜨리는 곳이다. 상처를 잊을 만도 하지만 그날의 광경이 지워지지 않는다.

구십을 앞둔 그녀에게 마지막 바람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가 함께 누워 있는 묘지가 너무 초라해 무덤을 정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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