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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칼, 검찰총장 '2년 임기제'의 역사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공안정국 방패막 되기도 한 총장 임기제

등록 2020.11.30 15:58수정 2020.11.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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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들과 재회한 윤석열 총장 8개월 만에 전국 검찰청 순회 간담회를 재개한 윤석열 검찰총장(가운데)이 10월 29일 오후 대전 지역 검사들과의 간담회를 위해 대전지방검찰청에 도착해 강남일 대전고검장(왼쪽), 이두봉 대전지검장과 인사를 나눈 뒤 건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검찰총장이 계속 버틸 수 있는 배경 중 하나에는 2년 임기제가 있다. 이 제도는 1988년 12월 31일 검찰청법 개정에 의해 "검찰총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제12조 제3항)는 조항으로 생겨났다. "이 법 시행 당시의 검찰총장의 임기는 그 임명된 날로부터 기산한다"는 부칙에 의해, 12월 6일 취임한 제22대 김기춘 검찰총장이 최초의 수혜자가 됐다.

당시 국민 여론이 임기제를 지지한 것은 검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서였다. 두 효과 중에서 국민들이 더 기대한 쪽은 정치적 중립성이었다. 이런 기대감을 반영해 대한변협과 평화민주당(평민당) 등이 국회와 정부를 압박해 임기제를 추진했다.

이 제도의 최대 목표가 정치적 중립성이었다는 점은 당시의 언론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그해(1988년) 9월 21일 치 <조선일보> 기사 '검찰총장 2년 임기제로'는 "정부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검찰총장을 임기제로 임명키로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2년 임기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쪽으로 당시 여론이 형성됐던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의중 혹은 국면전환용 개각에 의해 총장들이 임의로 해임되는 일을 막고자 했을 뿐이다. 흠결 사유가 생긴 총장들에 대해서까지 임기를 보장해주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국민들과 국회는 총장 임기와 관련되는 또 다른 제도는 건드리지 않았다. 1957년 2월 15일 제정되고 1986년 12월 31일 개정된 검사징계법이 그것이다. 이 법은 검사가 검찰청법 제43조(정치운동 금지 등)나 직무상 의무를 위반하거나 혹은 직무를 게을리 하거나 또는 검사의 체면과 위신을 손상시켰을 때는 징계위원회 심의에 따라 면직·정직·감봉·중(重)근신·경(輕)근신·견책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제2조·제3조). 만약 검찰총장이 징계 대상자인 경우에는 법무부장관이 징계 심의를 청구하도록 했다(제7조).

이랬기 때문에, 임기제가 도입될 당시에도 검찰총장이 검사징계법에 의해 면직 등을 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2년 임기제 보장은 검사징계법에 저촉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는 제도였다.

이처럼 징계 절차에 의한 면직 가능성이 있기는 했지만, 총장이 임명권자의 의중에 신경 쓸 필요 없이 2년간 소신껏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은 검찰 입장에서는 감사한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국민들이 그런 선물을 준 것은, 기본적으론 검찰이 정치 풍파에 휩쓸리지 않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총장들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임기제를 검찰 독립 혹은 검찰권 강화를 위해서는 잘 활용했지만, 정치적 중립성과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 중립성은 임기제 시행 전이나 후에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결정적 원인 중 하나는 총장들의 자세였다. 임기제와 정치적 중립의 상관성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임기제 취지에 신경 쓰지 않는 총장들이 많았음을 입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약 1개월 남기고 사표 쓴 검찰총장... "임기제 취지 알고 있나"

최초의 임기제 총장인 김기춘에 이어 정구영(23대)·김두희(24대)·박종철(25대)·김도언(26대) 총장이 취임하고 그 뒤를 사법시험 2회 출신인 김기수 총장이 이었다. 1939년 생인 김기(淇)춘보다 한 살 적지만 경남고 동기인 김기(起)수는 1995년 9월 16일 제27대 총장에 취임했다. 그의 임기는 1997년 9월 15일에 끝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물러났다. 그해 8월 6일 치 <조선일보>에 따르면, 그는 임기 종료를 1개월 9일 앞둔 이날 사의를 표명했다. 그것은 그날 있은 개각 때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정권이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 대비한 국면 전환용으로 11개 부처 장관의 교체를 단행한 이날, 최상엽 법무부장관이 경질되고 김종구 서울고검장이 법무부장관이 됐다.

김종구 신임 법무부장관은 사법시험 3회 출신이었다. 그래서 2회 출신인 김기수는 사시 1년 후배 밑에서 총장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사의를 표했다. 이 사의가 수리됨에 따라 후임 총장이 된 검사는 조만간 김대중 정권 하에서 부인이 옷 로비 사건에 연루됐다가 무죄를 받게 된 김태정이다.

김기수는 1개월 9일만 지나면 자동으로 물러나게 돼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임기제라는 국민의 선물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눈에 국민은 보이지 않고 대통령과 선후배 관계만 보였을 수 있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1997년 8월 8일 치 <한겨레> 기사(사설) '검찰총장 임기제 왜 있나'는 "사법시험 2회 출신인 김 전 총장은 김 대통령이 이번 개각에서 사시 3회 출신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하자 김 대통령에게 총장 임면의 재량권을 넓혀주기 위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법원·검찰·경찰·군 등 상명하복의 명령 체계가 특히 강조되는 부서에서는 후배가 총수가 되면 선배들이 옷을 벗는 관행이 있다. 그런 관행의 폐해는 일단 접어두고, 우리는 우선 김기수 씨와 김 대통령이 총장 2년 임기제의 취지를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

김기수는 임기제의 중요성에 얽매이지 않았다. 국면 전환용으로 단행되는 개각에서 자신이 정권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지, 대통령이 차기 총장을 임명할 때 제약을 받게 되지 않을지, 사시 3기 장관과 사시 2기 총장의 공존으로 인해 남은 임기 1개월 9일 동안 상명하복의 검찰 문화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지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총장 2년 임기제의 취지를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그의 행동이 임기제의 취지를 모르는 사람의 행동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임기제 취지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그의 인식을 드러내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대선을 앞둔 여당의 국면 전환용 개각에 맞춰 자기 임기를 스스로 축소한 사실은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임기제가 시행된 제22대 김기춘부터 윤석열 총장 전임자인 제42대 문무일까지 2년 임기를 다 마친 총장은 김기춘·정구영·김도언·박순용·송광수·정상명·김진태·문무일 8명이다. 21명 중 8명이 임기를 마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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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21일, '부산 기관장 모임' 고발 사건과 관련 대통령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어 서초동 검찰청사에 출두한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 8명 중에서 위의 <한겨레> 기사가 나온 1997년 8월 6일 이전에 총장을 지낸 사람은 김기춘·정구영·김도언 셋이다. 제22대 김기춘부터 제27대 김기수까지의 6명 중 3명이 임기를 마쳤던 것이다. 그런데 2년 임기제가 지켜진다고 해서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점은 김기춘과 김도언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2년 임기를 다 마쳤지만, 정치적 중립성과는 무관했다.

김기춘은 재임 중에 5공 비리(전두환 정권 비리) 수사를 용두사미로 만들어 5공 청산을 저해했다. 지금까지도 전두환이 골프장에서 샷을 날리고, 취재를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왜 이래?"라며 인상 쓸 수 있는 것은 김기춘 시절의 검찰이 쌓은 그 같은 죄악에도 어느 정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김기춘은 검찰권력을 이용해 야당을 탄압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해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주 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에서 후자를 옹호하고, 재야와 제도권 사이에서 후자를 옹호했던 것이다.

임기제가 '공안정국 방패막' 됐던 사례도 

그런 그에게 임기제는 좋은 방패막이 됐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면이 형성돼 야당 주도 하의 국회가 막강해진 상황에서, 그가 국민과 국회와 야당을 무시하고 보수여당의 방패막이가 된 데는 임기제가 적지 않게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의 강경한 공안정국 분위기가 임기제 덕분이라는 점은 당시의 검찰 내부에서도 인정됐다. 1990년 11월 25일자 <한겨레> 기사 '검찰총장 임기제 그 이후 (상)'에 이런 보도가 실렸다.

"검찰 내부에서는 김기춘 총장이 이런 강경 방침을 끝까지 밀고나갈 수 있었던 것을 총장 임기제 덕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년 임기제로 신분을 확실하게 보장해주지 않았다면 당시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의 파상 공세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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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한 공안정국 분위기가 임기제 덕분이라는 점은 당시의 검찰 내부에서도 인정됐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한겨레

 
김기춘은 총장 퇴임 뒤에는 법무부장관을 역임했고, 장관 퇴임 직후인 1992년 대선 직전에는 초원 복국집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복국집에 모아놓고 부정선거 대책회의를 하면서 "우리가 남이가?"라며 민주자유당(민자당)의 대선 승리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정치적 중립성과 무관한 그의 삶은 총장 재직 때나 후에나 일관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기제 시행 초기의 총장인 김도언도 임기제 취지를 무색케 만들었다. 위의 기사인 '검찰총장 임기제 왜 있나'는 "김도언 총장은 퇴임하기가 바쁘게 신한국당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국회의원이 됐다"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검찰 총수가 막강한 검찰 조직을 이끌고 권력의 이익에 적극 봉사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총장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자기소임에만 충실했다면, 대검찰청 청사를 나오기 바쁘게 신한국당 지구당 사무실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임기제 시행 초기의 총장들이 이렇게 임기제를 무시했으니, 이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민과 국회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기대하며 2년 임기제를 선물했다. 하지만 검찰은 '총장 임기제 덕택이었다'며 그 선물로 검찰권을 강화시켰을 뿐, 정치적 중립 따위에는 개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그 선물을 무기로 보수 권력과의 유착을 강화했고, 지금은 '검찰개혁'에까지 맞서는 형국이다. 이는 검찰이 그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집단인지를 의심케 만드는 일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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