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자빠졌다, 아픔보다 더한 것이 밀려왔다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오늘도 겨우 마음을 지켰습니다

등록 2020.11.30 15:27수정 2020.11.3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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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바닥을 찾지 못한 발이 허공을 헤매다 푹 꺼진 '진 바닥'으로 향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인지 떨어지는 발과는 반대로 두 손은 하늘로 치솟았고, 몸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앞으로 기울었다.

60도쯤 기울었을까, 아차 싶었는지 손들이 급하게 방향을 틀어 바닥을 내리쳤다. 가속도를 더한 탓에 충격이 상당했다. 그 사이 발은 그립던 바닥과 만났지만, 무릎은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바닥에 니킥을 꽂았다. 짐작하기 힘들었던 그들의 만남은 내게 놀람과 아픔을 선사했다.
 

아프다. 안구 보호를 위해 흑백 처리. ⓒ 남희한

  
퇴근길이었다. 회사 앞 사거리에 없던 인도가 생겼는데, 아직 메꿔지지 않은 틈이 화근이었다. 회사 일로 휘청거렸던 나는, 그렇게 세상의 틈에 걸려 끝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다 큰 어른의 자빠짐은 어딘가 실없고 안돼 보인다. 특히나 한껏 풀이 죽어 있던 마흔의 자빠짐은 더 처량하고 맥없어, 눈물 없이 볼 것이 못된다. 이래선 곤란하다. 서글퍼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이런 모습이라니. 아픔을 핑계로 눈물이 맺히려 했다.
  

마흔의 자빠짐 바닥을 치고 나니 일어날 일만 남았구나 ⓒ 남희한

 
그럴 만해서 그런 것들

평소보다 늦은 퇴근에 힐링이 필요했다. '힐링엔 역시 음악이지' 하며 유튜브로 음악을 트는데, 그날따라 섬네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요즘 콘텐츠들은 매력 덩어리다. 보는 순간 구미가 당긴다. 그리고 눈앞의 떡밥을 지나치지 못하는 물고기가 또 나다. 덥썩. 그렇게 나는 세상의 틈에 낚일 준비를 마쳤다.

노래를 들으려다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면서, 걷는 내내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늦은 시간이라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안 될 것도 없었는지 사고가 났다.

사실, 언제든 세상의 틈에 발목 잡힐 준비가 되어 있던 나였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것들을 제법 잘했다. 술이 전혀 받지 않는 몸으로 술자리를 즐겼고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치료와 운동을 미뤘다. 그리고선 한참을 고생한다.

그날의 늦은 퇴근도 평소의 안일함과 나태함이 선사한 콜라보레이션이었다. SW 개발에서는 일정 시점이 되면 사용자에게 배포(Release)라는 것을 하는데, 배포 직후에 내가 설계한 것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이 발견됐다. 심장이 사방을 날뛰었고 수습을 위해 몸도 이리저리 날뛰어야 했다. 그렇게 당연한 잔업이 이어졌다.

이런 저런 이유를 갖다 대 보지만, 문제의 타이밍이란 것이 본래 모든 것이 시의적절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우연의 완벽함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변명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믿을 수도 없고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냥 문제가 있다는 사실 뿐이다. 변명이 낄 자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갖다 댈 모든 이유의 중심엔 성실하지 않았던 내가 있었음을.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았던 저 너머의 찜찜함이 문제라는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놀람이 아닌 탄식을 내뱉었던 이유다.

비슷하게, 요즘 걸으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늘고 있었다. '이것만', '잠시만', '괜찮겠지' 했던 생각을 되짚어 보면, 그날의 자빠짐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회사에서 일으킨 문제만큼이나 길거리에서의 자빠짐도 시의적절 했고 딱 맞아 떨어지는 완벽한 우연의 결과였다. 만신창이 된 몸을 일으키며 틈을 노려봤지만 진짜 화근은 나였던 거다.

살을 내어주고 얻은 뼈에 사무칠 안도

자업자득.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자빠진 것이 그리 억울하진 않았다. 하지만, 속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이랬어야 했는데 저랬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일도 못하는데 걷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싶었다. 자책과 아쉬움의 홍수였다.

급격한 홍수에 휩쓸려 별 수 없이 떠내려가려는데 뜻밖의 동아줄이 눈앞에 내려왔다. 그 동아줄은 다른 아닌 '안도'. 나는 내가 쓰러졌던 그 자리에 아침까지 박혀있던 철근을 기억해냈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천만다행의 순간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출근길에 무릎 높이로 박혀 있던 철근을 보며 밤길에 사람이 다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걱정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만, 그대로 있을 수도 있었던 철근은 상상만으로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오싹함은 열을 올리며 차오르던 화와 아쉬움을 일순간에 식혀버리기에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매번 이렇다. 가끔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싶지만, 그 와중에도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 자빠졌지만 몸이 마주했던 것이 철근이 아니라는 것이 그렇고, 회사에서 사고는 쳤지만 내쫓길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그러하며, 아이가 넷이지만 등골이 버티고 있음이 그런 것들이다.(조금 쓴 웃음)

이런 식이다. 더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가져와 위안을 자체제작하고 어쩔 수 없는 지난 일을 나쁘지 않게 포장한다. 가만 보면 손재주가 제법이다. 아니. 생각재주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세상의 틈에 걸려 볼품없이 자빠졌지만, 계속 걸어야 하는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음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순간이 최악이 아닌 이유

오랜만에 자빠진 걸로 너무 멀리 온 듯하지만, 사는 게 이렇지 싶다. 별 생각 없다가도 세상 중요한 일이 되고 세상 중요한 일인 듯하다가도 별거 아닌 일이 된다. 어떡하든 편한 쪽으로 마음가닥을 잡아간다. 아무리 따가워도 상처를 소독해야 하는 것처럼 실수에 대한 결과를 감내해야 하긴 하지만, 따가움의 고통을 줄이려 입으로 바람을 불 듯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만하길 얼마나 다행이야~'

바닥을 치고 나니 일어서는 일만 남게 된 상황이다, 아무리 최악이라도 최악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떨어질 곳이 없어 보인다면 그보다 안전한 곳이 또 있을까. 탄탄한 바닥을 딛고 거기서 천천히 다시 일어서면 된다.

스마트폰 케이스에 흠집이 제법 생겼다. 언제 제 값을 할까 궁금했는데 또 한 건 해냈다. 덕분에 안의 기기는 멀쩡하다. 나의 철없음을 어찌할까 싶었는데 이번에 또 한 건 해냈다. 몸 여기저기에 흠집은 생겼지만, 다행히 오늘도 마음만은 지켰다. 역시, 이래저래 다행인 것들이 많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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