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진 감독은 그동안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에게 여행은 추억과의 만남이다. 과거의 추억을 여행 장소에서 떠올리며 지금의 추억 역시 기억의 사진첩의 한 공간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춘천, 춘천>을 통해 가을의 춘천여행을 마친 장우진 감독은 <겨울밤에>를 선보이며 겨울의 춘천을 여행한다. 춘천 4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중년커플을 통해 겨울의 감성을 담아낸다.
흥주와 은주 커플은 30년 만에 춘천을 찾는다. 즐거운 추억을 쌓을 것이란 기대도 잠시, 은주와 핸드폰을 잃어버리며 두 사람의 여행은 위기를 맞는다. 은주의 핸드폰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은 여행 장소를 되돌아간다. 음식점을 찾아가나 허탕을 치고, 절을 찾아가지만 시간이 늦었다며 문전박대를 당한다. 중간에 은주가 사라지면서 흥주 혼자 춘천거리를 돌아다니는 일까지 생긴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를 잡아 잠에 청하지만 두 사람 다 잠이 들지 않는다. 흥주는 밤거리를 홀로 돌아다니고, 은주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몰래 절에 들어간다. 은주가 핸드폰에 집착하는 모습은 흥주를 통해 나타난다. 은주가 핸드폰을 잃어버린 건 일종의 상징이다. 그 상징은 사랑의 상실이다. 은주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때, 흥주가 보이는 반응은 짜증이다. 아내를 도와도 모자랄 판에 가만히 있으라며 화를 낸다.
은주는 30년 전 흥주의 군 면회를 오면서 처음 춘천에 와봤다. 이곳에 있는 은주의 기억은 흥주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상실된 현재, 은주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은주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다닐 때, 흥주는 옛 동창을 만나 과거를 회상한다. 동창을 향한 흥주의 갑작스런 고백과 애정표현은 이들 부부 사이가 예전과 다름을 보여준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30년이 지나니 마음도 변해버렸다.
이 지점에서 감독은 흥미로운 시간여행을 시도한다. 흥주와 은주 부부의 여행지마다 군인 커플이 함께 등장한다. 이 군인 커플은 현재의 시간에 존재하지만 30년 전 흥주와 은주를 떠올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즉, 하나의 장소에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것이다. <춘천, 춘천>에서 춘천을 떠나려는 청춘과, 춘천으로 돌아온 중년 커플을 통해 시간의 교차를 보여줬던 장우진 감독은 이번에는 공존을 택한다.
군인 커플은 30년 전 두 사람이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작은 친구 사이였지만, 서서히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은 중년 부부가 잃어버린 사랑을 의미한다. 이런 공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포스터에 보이는 장소에서 은주와 군인 커플이 만나는 순간이다. 은주는 그들을 만남으로 30년 전의 자신을 찾게 된다. 커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은주의 모습은 이들의 앞날이 힘들겠지만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아낸다.
봄이 있으면 겨울이 있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청춘의 봄은 언젠가 겨울을 맞이하게 된다. 다시 봄날로 다가가는 건 자연스런 시간의 흐름이 아닌 서로의 노력임을 여행은 보여준다. 옛 추억의 회상이나 새로운 추억 만들기가 아닌 이런 공존의 순간은 기존 작품과는 다른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시간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을 만큼 자유로운 시간 조정을 통해 마법 같은 이야기를 펼친다.
30대 초반 장우진 감독이 겨울의 감성을 담아낼 수 있었던 건 그의 작업 스타일에 있다.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 장소를 여행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고 한다. 중년 배우들의 감성이 캐릭터와 대사에 담기기에 어색함이 없다. 감독이 도화지를 마련하고 배우와 스태프가 함께 채워나가는 이 작업과정은 감정에 깊이를 더한다. 특히 은주 역의 서영화는 감정적인 변화를 공감가게 담아내며 극을 이끌어 가는 힘을 보여준다.
가을의 멜랑꼴리를 지나 겨울의 쓸쓸함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장우진 감독 영화의 코드라 할 수 있는 여행과 시간을 계절에 잘 흡수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공간부터 중년과 청년을 함께 등장시킨다는 점 등 전작과 유사한 코드를 지니지만 이를 색다르게 표현하는 맛을 보여준다. 다음 춘천 여행은 누구와 동행을 할지, 그 여행에서는 어떤 시간의 마법을 선보일지 기대감을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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