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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이 없어진 '무명천 할머니'... 그 끔찍한 세월

[나의 학살 현장 답사기] 역사가 없는 이들의 역사

등록 2020.12.02 20:04수정 2020.12.0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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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천 할머니 삶터 누구나 자유롭게 찾아올 수 있게 상시 개방이라고 봤는데 정낭에 나무 기둥 세 개가 다 걸려 있어서 출입이 안되는 줄 알았다. 나처럼 잘 모르는 외지인을 위해 출입방법에 대한 안내문이 외부에 있으면 좋겠다. ⓒ 박기철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에는 '무명천 할머니 삶터'라는 곳이 있다. 사전에 검색해봤을 때는 이 곳은 누구나 항상 관람할 수 있는 생활 속 전시관이라고 나와 있었다.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이 작은 집을 찾았다. 그런데 정낭(제주도의 대문)에 나무 기둥 3개가 모두 끼워져 있었다. 이는 사람이 없고 닫혀 있다는 의미였기에 당황스러웠다. 혹시 일요일이라서 문을 닫은 것인가 생각해서 다음 날 다시 찾아오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 날도 정낭은 그대로였다. 30여 분을 서성이다가 주변 동네 할머니에게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여쭸다. 그러자 그냥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다. 뭔가 허탈한 느낌을 가지고 나무기둥이 드리워진 정낭을 넘어 작은 쪽문을 열었다.

8평짜리 집은 주인이었던 무명천 할머니의 손때 묻은 주방 기구와 각종 집기들이 그대로 있었다. 본명이 진아영인 무명천 할머니는 1914년에 태어나 2004년 9월에 성이시돌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시민사회는 이 집을 보존하기로 결정했고, 준비를 거쳐 2008년 일반에 개방했다. 그런데 이 할머니 개인의 삶을 보존회까지 만들어서 기억하려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주방 내부 작은 출입문을 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이다. 할머니 생전의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있다. ⓒ 박기철

 
할머니 이름은 진아영

1948년 10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송요찬 중령을 사령관으로 한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사령관이 된 송요찬은 10월 17일에 포고문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10월 20일 이후 해안선에서 5km 이외 지점의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포고문은 참 잔인할 정도로 성실하게 이행됐고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특히 토벌대는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무장대로 간주해 체포했다. 그리고 밤에는 무장대가 젊은이들을 산으로 끌고 갔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낮에는 토벌대, 밤에는 무장대를 피해 숨어야 했다. 허영선 시인의 표현대로 '젊은 것이 죄'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1월, 제주 한경면 판포리에 무장대가 들어왔고 토벌대의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1월 12일 밤, 당시 서른 다섯 살의 진아영 할머니는 집 앞에서 토벌대가 쏜 총에 아래턱을 맞고 쓰러진다. 그녀의 할머니가 피 흘리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눕혔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사촌은 왜 죽은 사람을 집 안에 데려왔는지 의아했다고 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하지만 총상으로 인해 살이 썩어가면서도 목숨은 끈질기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살아났지만 아래턱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돌봐줄 사람이 없자 언니와 사촌들이 있던 월령리로 옮겨왔다. 당연하게도 평생을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모두가 밭에 일하러 가서 마을이 텅 빈 낮이면 마을 어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라도 집을 비우게 되면 집 안팎으로 자물쇠를 꼼꼼히 걸어 잠그고 다녔다. 가져갈 것도 없는 세간살이지만 누군가 또 자신의 삶을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아래턱이 없어서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위장병을 비롯해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또한 흉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항상 무명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할머니는 생전 누구에게도 음식 먹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잔칫집이나 상가집에서도 음식을 받으면 집으로 가져와서 혼자서 먹었다. 그리고 약값을 벌기 위해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바다에서 톳을 채취해 팔거나 김매기 품팔이 등을 해야 했다.

턱이 상해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제대로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이 작은 집에서 그 큰 고통을 오롯이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가해자인 국가는 할머니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옹색한 살림살이를 보니 더욱 가슴이 아파왔다.
  

할머니의 방 생전에 쓰시던 침구류와 잡동사니들이 보전되어 있다. TV를 켜면 할머니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조작을 잘 못해서 그런지 켜지지 않았다. ⓒ 박기철

 
'역사가 없는 사람들'의 역사

1990년 개봉한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와 1998년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뮬란'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기존 서구 중심의 인식을 뒤집은 것이다.

그전까지 서부 개척사를 다룬 영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악당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늑대와 함께 춤을'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선하고 자연을 존중하며 숭고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서구 정복자들은 탐욕스럽고 잔인하다. '뮬란' 역시 기존 디즈니의 '공주 서사'를 새롭게 써내려 갔다. 왕자를 기다리는 백인 공주가 아니라 평범한 동양 소녀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에 전세계는 크게 호응했다.

이렇게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보려는 시도는 1970년대 말 '역사인류학'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기존의 역사가 주로 정치/경제/사회 제도의 변화, 그리고 소수 엘리트와 서구 중심으로 기술됐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이런 단편적인 역사 기술을 탈피해 그 반대쪽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또한 역사인류학은 해당 시대를 살았던 노동자와 같이 평범한 개인들의 삶에 집중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한다.

이는 그동안 역사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 소위 '역사가 없는 사람들(the People without History)'도 역사를 움직이고 함께 해왔다는 주체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이 덕분에 역사인류학은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인식의 폭을 넓히는 게 크게 기여했다.

우리는 해방 전후 자행됐던 학살을 좌우 이념 대립이나 정치사회적 인과관계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역사의 주변에 머물던 계층과 개인의 삶도 함께 조명할 때 우리는 역사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무명천 할머니의 삶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기억의 댐을 쌓아야 한다

1945년 이후 일본에서는 히키아게샤(引揚者, 인양자, 구 식민지에서 돌아온 해외 귀환 일본인)들이 전쟁 피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탄압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결국 1967년에 일본 정부는 349만 명에게 특별교부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특별교부금은 배상금과 달리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당장의 입막음 성격이 강했다. 이후 전쟁 피해자들의 요구에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으로 대응하고 있다.

국가무답책이란, 국가 배상법이 1947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이전에 국가의 권력 행사로 인해 발생한 개인의 손해는 국가가 책임질 법적 근거가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런 궁색한 변명의 진짜 속내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관련자들이 모두 사망하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특별교부금이 지급됐던 1967년은 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난 시기였다. 이 때 이미 대상자 중 50세 이상은 65%, 35~49세는 32%가 사망한 뒤였다.

한국전쟁 전후 자행됐던 학살 책임자들 역시 이와 비슷했다. 수십 년 동안 피해자와 유족들을 연좌제를 비롯해 갖은 물리적 사회적 폭력으로 입을 틀어 막고 시간을 끌었다. 진실 규명은 차치하고 위령제도 지낼 수 없어 제주에서는 굿판을 빌려 간신히 그날의 억울함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 사이 수많은 이들이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진상규명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을 굳이 들춰 내지 말고 미래를 고민하자고 말한다. 그 동안의 모습을 봤을 때 이는 생존자들이 모두 죽고 기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모든 사회운동은 일종의 기억 투쟁이라고 말한다. 기억을 지우기 위한 탄압과 기억하기 위한 몸부림 사이의 대결인 것이다. 그는 1998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평화박물관회의에 참가했다고 한다. 전세계 인권운동가와 학자들이 모인 학술대회였는데, 한 발표자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 발표자는 자신들의 활동이 '기억의 댐'을 쌓는 것이라고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관련자가 모두 사망하고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면 비극은 다시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억의 댐 한 부분에 무명천 할머니의 삶이 있다. 그리고 수 많은 또다른 개인들의 삶이 모여 댐을 이루고 있다. 이 댐을 쌓고 유지하는 것은 특정 운동가나 지식인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의 역할일 것이다.
 

할머니 생전의 모습 평생을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살아 '무명천 할머니'라 불리게 되었다.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도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다. ⓒ 박기철

   
[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이연식, <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역사비평사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제주4.3평화재단, <제주 4.3아카이브>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일조각
허영선,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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