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 17:17최종 업데이트 20.12.0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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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항전 책임을 맡으면서 세자가 됐다. 세자가 된 그는 일본의 침략을 막는 데 기여했지만, 최대 동맹국인 명나라의 견제 때문에 곤경을 겪었다. 명나라는 의례적으로 해주던 세자 책봉을 그에게는 해주지 않았다. 조선에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는 세자 책봉에 제동을 거는 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높이고자 했다.

여기에는 명나라의 또 다른 속사정도 작용했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제3황자인 주상순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신하들은 제1황자인 주상락을 선호했다. 이 상황에서 조선 조정이 장남이 아닌 광해군에 대한 책봉을 요청하자, 명(明) 신하들은 만력제가 이를 빌미로 주상순에게 황위를 넘기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합세해서 광해군에 대한 승인을 저지했다.


명의 책봉은 군주나 세자가 되는 필수 요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받지 못하면 명과의 관계에서 군주나 세자의 지위를 내세울 수 없었다. 이는 국내 반대파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명의 승인을 받지 못한 광해군은 그래서 위태했다.

그런 틈을 타 광해군을 위기로 내몬 정치세력이 있다. 이들은 광해군과 그리 멀지 않은 세력이었다. 최초의 당파(붕당)들인 서인당과 동인당 중에서 후자는 남인당과 북인당으로 분열됐다. 광해군은 동인당의 분파인 북인당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됐다.

광해군을 집중 공략한 쪽은 서인당도, 남인당도 아니었다. 광해군이 31세 때인 1606년에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출생한 것을 계기로 북인당은 대북당과 소북당으로 갈라졌다. 이미 14년 전에 세자가 된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세력은 대북당으로 뭉쳤고, 서얼 출신인 광해군과 달리 적장자 신분을 가진 영창대군을 지지하고자 하는 세력은 소북당으로 뭉쳤다. 바로 이 소북당이 광해군을 괴롭혔다. 광해군의 여당과 형제 관계라 할 수 있는 소북당이 광해군을 훼방했던 것이다. 

선조의 당부
 

일찍 죽은 아들 영창대군을 위해 인목대비가 개보수해준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 ⓒ 김종성

 
아무리 적장자가 태어났다 해도 서얼 출신 세자가 14년간이나 자리를 지켰다면, 갓 태어난 적장자에게 눈길을 돌리기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소북당의 시선이 움직인 것은 위에서 설명한 명의 태도에 더불어 선조 임금의 태도에도 기인했다.

선조의 정통성은 아들인 광해군보다도 못했다. 광해군은 '왕의 서얼'이지만, 선조는 '왕의 서얼의 아들'이었다. 선조는 중종의 서얼인 덕흥군의 아들이었다. 이것을 콤플렉스로 생각한 선조는 기왕이면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광해군은 선조의 눈에 차지 않았다. 소북당은 이런 선조의 의중을 파악했다. 이들 소북당의 지도자가 되어 광해군을 방해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 있다. 바로 영의정 유영경(류영경)이었다.

광해군보다 25년 빠르고 선조보다 2년 빠른 1550년에 출생한 유영경은 중종의 아들인 명종 때에 유년기를 보냈고, 선조 때인 1572년 과거시험에 급제했다. 22세라는 빠른 나이에 급제한 유영경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국정의 잘잘못을 논박하는 기구인 사간원에서, 말 그대로 바른말 하는 자리인 정언(正言) 직도 역임했다.

1592년(42세)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광해군뿐 아니라 그에게도 기회가 됐다. 그는 의병을 모집하고 전공을 세우는 방법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공적을 바탕으로 전쟁 후인 1599년(49세)에 지금의 검찰총장인 대사헌이 되고 1602년에 이조판서와 우의정이 됐다. 1605년에는 영의정에도 올랐다. 그는 허수아비 영의정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백과사전과 논문들에서는 그가 영의정이 된 해가 1604년으로 기록돼 있지만, 음력으로 선조 37년 12월 6일 자(양력 1605년 1월 24일 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그날은 1605년 1월 24일이었다. 실록에 적힌 12월 6일을 양력 날짜로 잘못 이해하다 보니, 1604년 12월 6일에 영의정이 됐다는 서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유영경은 선조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 후궁 김인빈(인빈 김씨)과 선조의 딸인 정휘옹주가 유영경의 아들인 유정량과 혼인했다. 1608년에 선조가 유영경을 비롯한 일곱 신하들에게 유교(유언)를 남긴 것은 그런 인연에도 크게 기인했다.

광해군 즉위년 2월 2일 자(양력 1608년 3월 17일 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죽기 직전의 선조는 "대군이 어려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없게 됐으니, 이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따름"이라며 영창대군을 "애호(愛護)"해달라고 당부했다. 영창대군은 만 2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가 죽으면 광해군에게 정권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영경처럼 특별히 신임하는 신하들을 따로 불러 선조가 그런 당부를 했던 것이다.

선조가 그런 당부를 했을 만큼 유영경의 권세는 막강했다. 훗날 기록된 인조 16년 7월 7일 자(1638년 8월 16일 자) <인조실록>은 "유영경이 7년간 국정을 맡으면서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고 자기 당파를 심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권력을 행사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을 사적이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악용했다. 권력을 이용해 뇌물을 받고 관직을 거래한 것이다.

한 번은 수군 장교가 군량미를 가득 실은 배를 유영경에게 통째로 바쳤다가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항복한테 발각돼 국고에 귀속된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유영경에게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사람(A)과 동명이인인 사람이 A인 척 행세하며 관직을 받으려 했다가 들통 난 적도 있었다.

유영경은 권세를 함부로 사용한 일뿐 아니라 속 좁음으로도 입방아에 올랐다. 그가 검찰총장인 대사헌 후보에 올랐을 때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고위 공직자 후보가 되면 집중적인 검증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앙심을 품고 권력 장악 뒤에 복수를 시도한 일이 있다.

그런 그를 보고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인상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선조 41년 1월 18일 자(1608년 3월 4일 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정인홍은 유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문에서 "장차 저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정인홍은 대북당이고 유영경은 소북당이었다. 당파가 달라 과격하게 비판한 측면도 있지만, 유영경 스스로 비판을 자초한 측면도 많았다.

어쩔 수 없이 "어서 어좌에 오르시라" 
 

본문에 인용된 “저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라는 문장.

 
그런데 유영경은 부정부패나 국정농단 혹은 속 좁음이 아닌 다른 일로 훨씬 더 유명하다. 그것은 광해군의 왕위 등극을 방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두 살짜리 영창대군한테 줄을 선 일이다.

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한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겠다는 전교를 내렸을 때, 유영경은 전교를 숨기고 극비로 무마하려 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조차 광해군의 등극을 기정 사실로 했는데도 유영경은 인목왕후의 의중마저 무시해 버렸다.

유영경 같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광해군처럼 장성한 왕자보다는 영창대군처럼 어린 왕자가 대권을 잇는 게 당연히 유리했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이 6년간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방원 같은 장성한 왕자가 아닌 이방석 같은 어린 왕자가 세자가 됐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아닌 영창대군이 왕이 됐다면, 유영경이 정도전 못지않은 혹은 버금가는 권세가로 역사에 기록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선조가 유영경 등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했던 것도 유영경의 그 같은 이해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유영경은 선조 정권 말년에 광해군의 앞길을 방해하며 광해군과 경쟁 구도를 조성했다. 그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지만, 1608년에 선조가 5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생애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두 살짜리 영창대군이 서른세 살짜리 광해군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영경은 앞이 캄캄해지게 됐다.

이 시점에 그는 역설적인 혹은 고약한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그 상황은 신왕의 즉위식이 있었던 광해군 즉위년 2월 2일(1608년 3월 17일)에 있었다. 그 전날 주군인 선조를 잃고 상심에 빠진 유영경은 이날 마음에도 없는 퍼포먼스를 해야 했다.

즉위식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는, 신하는 "어서 어좌에 오르시라"고 강권하고 세자는 "내 어찌 차마 오르겠는가"라며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다. 신하의 대부분은 진심으로 그런 강권을 하고, 세자들은 거짓으로 그런 사양을 한다. 한 사람은 진심을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거짓을 말하는 의례적인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위 날짜의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 즉위식 때는 두 사람 다 거짓을 말했다. '어서 오르시라'고 강권하는 배역을 맡은 인물은 다름 아닌 영의정 유영경이었다. 광해군이 왕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유영경이 '어서 오르시라'며 강권하는 대사를 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귀에는 그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을 수도 있다.

어서 오르시라고 강권하는 충신의 배역을 맡았지만 유영경은 오래갈 수 없었다. "저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습니까?"라고 말한 정인홍이 광해군 정권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영경이 신(新) 정권의 쓰임을 받을 수는 없었다.

세자의 왕위계승을 훼방하며 경쟁 구도를 조성하던 유영경은 광해군이 왕이 된 그 해에 귀양을 가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유영경은 광해군의 경쟁자처럼 비칠 수도 있었지만, 크게 보면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더욱 극적으로 빛내주는 희생적인 조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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