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의 역사를 한눈에 담고 싶다면 이 책을

[서평]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은 최고의 독립운동사 입문서, 박시백의 '35년'

등록 2020.11.30 14:18수정 2020.11.3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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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한 몸 살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던 선조는 왕으로서의 권위와 체면을 되살리기 위해 꼼수를 냈다. 일본군을 패퇴시킨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힘이요, 조선의 군대가 한 일은 거의 없다고 임진왜란의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그 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운 장수들보다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한 신하들의 공이 더 높아지게 되었다. 선조를 호종해 의주까지 피난했던 신하들이다. 자신을 호종한 신하들의 공이 높아지니 그 중심인 선조 역시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 어려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8.15 해방은 오로지 미군의 덕이요, 원자폭탄 덕이지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선조처럼 공식화하지는 않았지만 선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널리 퍼뜨린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 <35년> '작가의 말' 중에서
 
항일투쟁 35년의 역사를 7권의 작품으로 완성해낸 박시백 화백은 '작가의 말'을 통해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독립의 결정적 요인이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설명은 무지 혹은 의도적 왜곡이라고.

일제강점 35년의 역사는 치열한 투쟁의 역사였다. 수많은 이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총을 들었고 폭탄을 던졌다. 대중을 조직하고 각성시켰으며 외교전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한 명 화폐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못한 현실은 항일투쟁의 주인공들이 역사의 비주류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계열의 상징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관이 2002년에 가서야 문을 연 남한이나, 김일성과의 정치투쟁에서 숙청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지 않는 북한이나 항일투쟁의 역사를 왜곡하고 과장하고 망각했다는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립투쟁의 양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8할 이상이 해방 후 남과 북 어디에서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독립된 조국의 공신록(功臣錄)에 그들의 이름은 빠져 있던 셈이다.
 

<35년>. 출판사 홈페이지 캡처 ⓒ 정수현

 
<35년>의 제 7권은 1940년~1945년 시기를 다루고 있다. '친일 대합창' 파트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언론, 교육, 여성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변절하여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이들을 상세히 기술한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이한 해방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주류로 군림했다. 일곱 권의 책 중에서 이 대목을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 참담한 역사가 이후 우리 사회의 원형(元型)이 되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작년 여름 일본과의 무역전쟁 상황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한심한 시선으로 질타하던 유력 일간지의 칼럼과 기사가 얼마였던가. 올해 광복절에 '친일청산'을 언급한 광복회장의 발언을 국론분열 운운하며 신성불가침의 금기를 거드린 것처럼 비난하던 언론과 보수야당의 행태는 또 어떠했던가.
 
"시대의 요구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그들의 정신, 그들의 투쟁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반한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그들은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집안을 일으켰다. 나아가 해방 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뿐인가, 민족교육인이니 민족언론인이니 현대문학의 거장이니 하는 명예까지 차지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로, 친일부역자는 친일부역자로 제 위치에 자리 잡게 해야 한다."
- <35년> '작가의 말' 중에서
 
벌써 75년이 지난 독립투쟁사를 공부하고 기억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본격적으로 해당 분야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발음하기 어렵고 비슷비슷하게 들리는 독립운동단체 몇 개만 접하고 나면 머리가 아파온다.

또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의 독립투쟁이 하나의 강력한 구심 아래에서 전개되지 못했기에 국내, 만주, 연해주, 상해, 미주 등등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이념을 갖고 싸워온 이들의 활약상을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집어 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 권을 5년 단위로 설정하여 국제정세의 변화와 맞물린 국내외 독립운동의 흐름과 의미를 읽어낸 <35년>은 더욱 가치가 빛난다. 항일투쟁 35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최고의 입문서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박시백 화백은 맺음말에서 모순되는 아쉬움을 피력했다. 더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기개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너무 많은 사람과 사건과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좀 더 상세하고 재미있게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자의 그 아쉬움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함께 짊어져야 할 숙제이며, 고난의 시대를 치열하게 싸워 이겨낸 이들을 역사의 주류로 올려놓아야 할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35년 1~7 세트 - 전7권 -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박시백 (지은이),
비아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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