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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오래 썼는데 제자리 같다면 이걸 해보세요

[에디터만 아는 TMI] 새로운 형식이 돋보인 권석천 칼럼... 다르게 쓰고 싶었다, 절박하게

등록 2020.11.27 09:02수정 2020.12.02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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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만 아는 시민기자의, 시민기자에 의한, 시민기자를 위한 뉴스를 알려드립니다.[기자말]
오디션 프로그램은 꼭 챙겨보는 편이다. 최근 <싱어게인>이라는 다소 생소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기회가 필요한 가수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신개념 리부팅' 오디션 프로그램이란다.

첫 방송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건 심사위원을 유희열, 이선희 등 시니어와 선미, 규현 등 주니어로 나눠 놓은 거였다. 주니어 심사위원단이 생소하면서도 방송에 묘한 매력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가령, 무명가수 조 참가자 가운데 '영화로 재탄생한 밴드의 가수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49호가 노래를 마쳤을 때 어게인 버튼을 누르지 않은 심사위원은 시니어 이선희뿐이었다(심사위원 8명 중에 6명 이상 어게인 버튼을 눌러야 참가자는 다음 무대에 설 수 있다).

주니어 심사위원들이 49호의 무대에 대해 "시작하자마자 여유가 넘쳤다",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고음을 어떻게 저렇게 탄탄하게 부르냐" 등 극찬을 아끼지 않자 이선희가 말했다.

"주니어(심사위원)들 심사평을 듣고 '이 점을 새롭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노래를 오래 하다 보면 자기만의 습관이 생긴다. 그 습관이 올드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니어 친구들은 그 점을 좋다고 생각하더라."

유희열도 말을 보탰다.

"저도 고민한 게 솔직히 창법이나 제스처가 너무 상투적이었다. 저희 세대 눈에는 이러면 젊은 세대가 안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다들 흥겹게 듣고 있더라. 상투적인 것도 수준 이상으로 가면 예술이 될 수 있구나 했다. 레트로의 상징적인 무대였지 않았나 싶다."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심사위원들의 평을 듣다보면 하나라도 배울 게 있었다. 아니 솔직히 배가 아팠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평가를 즉석에서 대놓고 할 수 있다는 게. 심사위원들이 모두 시니어급이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49호 가수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내 일을 돌아봤다. 나는 어땠을까. 오래 글을 써온 기자들의 글을 선입견을 가지고 본 적은 없었을까. 기회를 막은 일이 없었을까. 나도 오래 글을 써온 시민기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오래 노래를 불러온 사람에게 심사위원들이 하듯, 나도 오래 글을 써온 사람들에게 불편하더라도 약이 되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 

가끔씩 쪽지로 글쓰기의 어려움을 털어놓는 시민기자들이 있다. 아쉬움의 표현 같기도 하고, 정말 속상해서 하는 말 같기도 한 피드백을 시민기자들에게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시민기자와 기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잘했다 싶은 순간도 있지만 속 시원히 말을 못해줬네 싶을 때도 있다. 이제 처음 기사를 쓴 시민기자거나 내가 편집기자 일을 한 만큼의 시간을 함께해온 시민기자들에게 특히 그랬다. 처음은 처음이라 어렵고, 오래된 관계는 알고 지낸 시간 만큼이나 힘들었다.

오마이뉴스가 생긴 지 올해로 20년이니, 30세에 처음 기사를 썼다면 그도 지금 나이가 50이다. 30대 때의 글과 50대의 글이 같을 수 없을 거다. 20대의 나와 40대의 내가 다르듯이. 글을 써오던 습관들이 있는 그들에게 내가 핀셋처럼 정확한 이야기를 해주기란 어렵다. 불편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그저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만 속으로 삭일 뿐이다.

다르게 쓰고 싶었던 25년차 기자의 칼럼
 

권석천 지음 '정의를 부탁해' ⓒ 동아시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더 다르게, 새롭게 쓰면 좋을 텐데 싶은 마음이 자꾸 든다. 그때마다 권석천(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책 <정의를 부탁해>(2015년 출간)가 생각난다. 이 책을 한 번이라도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건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었다. 그는 법조기자 출신답게 사건 사고, 검찰 법조계 문제, 세월호 등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룬다. 딱딱한 내용이 어렵지 않게 술술 잘 읽혔던 것은 글의 형식이 다채롭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 그는 자신만의 시각과 방법으로 사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순창군 옥천 인재숙이 2013년도 대학입시에서 35명 전원 합격이란 역대 최고 성과를 거뒀다'는 기사를 보고 그는 전라북도 순천에 있는 인재숙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원래 기사에는 없는, 기사를 보며 든 의문을 풀어내는 게 인상적이었다(이 밖에도 그는 의문이 드는 기사를 보면 현장을 찾아가 또 다른 뉴스를 발굴해 내는 칼럼을 자주 썼다). 그 기사를 보고 직접 인재숙을 찾아갈 생각을 한 논설위원이 몇이나 될까 싶어서.

그밖에 평소 눈여겨본 영화나 책, 미드를 포함한 드라마 내용을 칼럼에 적절히 인용하기도 하고, 소설의 한 장면이나 특정 소설 형식을 빌려 쓴 칼럼도 있었다. 심지어 가요의 가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글을 전개하거나, 조침문의 형식을 빌려 쓴 칼럼(중수부를 조문함)도 있다.

이 책에서만 '80여 개의 칼럼에서 소설체, 반어체, 고어체, 대화체, 편지체, Q&A 등을 활용했다'고 하니 대단했다. 책만 봐도 알 수 있는 그의 열린 자세는 보고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니 또 배가 아팠다.

어떻게 하면 더 재밌을까, 그 '절박한' 고민
 

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그는 왜 이렇게 쓰는 걸까. 그 궁금증이 우연히 풀렸다. 지난 6월 <사람에 대한 예의> 출간 이후 예스24와 한 인터뷰에서 권석천(현 JTBC 보도총괄)은 다양한 형식의 글을 계속 시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12년도부터 칼럼 '권석천의 시시각각'을 썼는데 다양하게 써보고 싶었어요. 신문에 실리는 글이 재미없었거든요.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대충 알면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러면 내 글도 그렇게 읽힐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다르게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절박했어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고요."

'나름대로 절박했다'는 말이 나에게로 와서 묻는다. 너는 절박하느냐고. 얼마나 절박 하느냐고. 마음이 따끔거리다 못해 욱신거린다. 

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동아시아, 2015


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은이),
어크로스, 2020


#에디터만 아는 TMI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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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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