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선생의 고단했던 여정을 따라 걸었다

윤석산 교수와 함께하는 3차 동학기행

등록 2020.11.17 11:38수정 2020.11.1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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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사람 씨 말랐다"던, 위령탑 앞에 서자 함성이 들렸다)

'성화'의 길을 걷다

특정 시간과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명명하여 기억하는 행위를 '성화'라고 한단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기억하는 행위는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며 특정 날짜와 장소를 명명하는 것은 그 안에 기억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뜻을 헤아려 기억하려는 것일 것이다.

순례길은 '성화'의 대표적인 의례 중 하나일 것이다.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는 좌선이나 명상, 종교의 발상지나 성인의 자취를 따라 걷는 성지 순례길에 나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기 성화의 길에 접어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석산 교수와 함께 한 해월 최시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은 마음의 행로까지 돌아보는 진정한 '성화의 순례길'이었다. 
  

순도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윤석산 교수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가 순도한 관덕정 근처에 세워진 순도비 ⓒ 이명옥

 
3차 동학 기행은 동학 1대 교조인 수운 최제우 순도지인 대구의 관덕정에서 심고(묵상)를 하며 시작했다.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좌도난정(左道亂正)'을 다스린다는 죄명으로 대구 관덕당 앞에서 참수 당하였다.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것은 도가 아닌 것으로 유교의 정신을 어지럽혔다는 뜻이다.
  

최제우 나무 앞에서 종로 초등학교의 최제우 나무 앞 ⓒ 이명옥

 
대구 감영이 있었다는 자리에는 1900년에 종로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종로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최제우 나무'라고 부르는 수령 400년 된 특별한 회화나무가 있다. 중죄인을 가둬두던 감옥이 마주보이는 곳에 심어져 있던 회화나무는 아마도 수운 최제우가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억울하게 중죄인을 가둬두던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최제우 나무'라고 부르고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운은 왜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잇게 했을까?


수운 최제우는 왜 학식이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닌, 해월 최시형 선생에게 도통을 잇도록 했을까? 윤석산 교수는 "해월 선생이야말로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를 끊임없이 실천하고 스스로 '시천주'를 깨우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검곡 최시형 옛 집터 가는 길목에서 최시형 옛 집터 가는 길 ⓒ 이명옥

 
해월은 서른세 살 되던 해에 마북동 안쪽에 있는 검곡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며 살다가 서른다섯 살 되던 해 입도해 수운에게 도를 받는다. 입도 후 매달 서너 차례씩 수운을 찾아가 설법을 들었고 돌아와서는 한울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명상과 극기 훈련, 엄동의 혹한 속에서 찬물로 목욕재계 등 도를 깨우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런 해월이었기에 공자가 안회의 사람됨을 알아본 것처럼 수운도 해월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에게 도통을 잇도록 한 것이다. 도를 듣기만 하고 행치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윤석산 교수는 엄밀히 말해 "동학은 새로운 신이나 신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람과 우주 안에 내재해 있는 한울님, 사람과 만물 안에 존재하는 한울님의 속성을 깨닫고 그 신성을 이끌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우주아로서의 사람, 만물 안에 깃든 한울님의 속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시천주(侍天主)' 라는 말이다.
 

황성공원에서 최시형 선생 동상 앞에서 윤석산 교수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이명옥

   
이번 기행은 수운 최제우 순도지 대구 관덕정 심고를 시작으로 해월의 탄생지 경주부터 해월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더듬어 해월의 족적을 따라 순례길을 이어갔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경주시 황오동 227번지에서 태어나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 때 아버지마저 잃어 고아가 됐다.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어렵게 살던 해월은 17세 때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리 울금당 제지소 마을에서 한지를 만들어내는 일을 거들다가 18세 때부터는 여러 마을에 종이값을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제지소에서 일하며 익힌 기술과 관계를 맺게 된 여러 사람들은 나중에 <동경대전>을 간행하는데 많은 보탬이 됐다.

19세 대 밀양 손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해월은 마북동에 살면서 중망(지금의 면장이나 이장)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했다. 33세에 마북을 떠나 검곡에서 화전을 일구며 산다. 35세 때 입교해 도를 받는다. 37세에 북접주가 되었다가 도통을 이어받아 2대 교주가 되어 교세를 확장하고 포덕을 펼친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옛 집터가 있는 검곡은 해월이 2대 교주로 천도를 지키고 수행한 중요한 장소다. 옛 집터는 산속에 묻혀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한울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엄동설한에 목욕재계를 했을 곳으로 짐작되는 웅덩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돌아 본 장소는 최초의 접주제 실시 지역인 포항시 북구 흥해읍 매산리 636-67, 50번지 손봉조의 집이다. 접주제는 동학이 얼마나 쳬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포덕 활동을 펼치고 교세를 관리했는지 잘 알게 하는 증거다.

수없이 피신을 해야 했기에 보따리 하나만 가지고 다녀서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해월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봇짐을 지우는 일 없이 자신의 봇짐을 스스로 지고 다녔고, 잠을 잘 때 한쪽 어깨는 봇짐 끈을 묶은 채 봇짐을 베고 자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고 전한다.

보따리 하나만 지고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했던 해월 최시형 선생의 고단했을 여정의 무게가 그의 발자취마다 새겨져 있었다.
  

삶은 바람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울금동 가는 길 ⓒ 이명옥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가 잠시 바위에 걸터 앉아 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을 바라본다. 그때 바람이 흩날리는 낙엽에 실어 전하는 질문이 가슴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진다.

"그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 D'ou venez –vous, Où allez-vous ?)"
#동학기행 #해월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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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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