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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명 수장시키려 전차상륙함 동원... 기막힌 작전

괭이바다에서 죽은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

등록 2020.11.27 20:44수정 2020.11.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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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는 지난 6월 13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앞 괭이바다에서 “70주년 제13차 창원지역 합동추모제”를 지냈다. 사진은 노치수 회장. ⓒ 창원유족회

   
1950년 7월 중순. 밧줄에 묶인 이들이 불편한 자세로 마산 앞바다에 서 있었다. 파란색과 흰색 옷 입은 이들이었다. 파란색 옷을 이들은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용수였다.

이들은 마산형무소 재소자였다. 흰 옷을 입은 이들은 마산시 보도연맹원들로 6.25가 발발하자 경찰에 의해 예비검속돼 마산형무소에 구금됐다. "모두 저 배에 탄다. 실시." 헌병대 장교가 눈으로 가리킨 곳은 괭이바다로 불리는 바다 한가운데였다.

바다 위에는 어마어마한 배가 떠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배였는데 '집채만하다'는 표현도 적절치 않았다. '작은 산'만한 크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괭이바다에 떠있는 전차상륙함(LST)로 갈아탄 때는 썰물 때였다.

전차상륙함 동원해 1681명 수장

전차상륙함으로 가는 중간에는 헌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밧줄로 묶인 이들은 앞 사람 허리를 붙잡고 앞으로 전진했다. 전차상륙함의 열린 문은 마치 '고래 입'같았고 그들은 고래의 밥이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트럭 십여 대에서 내린 이들이 모두 탄 것을 확인한 헌병대 장교는 밀물 때까지 기다렸다. 몇 시간 후 바닷물이 밀려왔다. "부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거품을 일으킨 군함은 항구를 출발했다.

전차상륙함이 바다 한가운데로 나오자 군경은 2인 1조가 되어 밧줄에 묶인 이들을 괭이바다에 내던지기 시작했다. 바다에 파란 색과 흰 색의 점들이 찍혔다. 한 점, 두 점, 수십 점, 수백 점이 찍혔다. 내던져진 이들은 발을 힘차게 굴러 수면 위로 목을 내밀었다. "어푸" "어푸" 하지만 그곳에는 영락없이 기관총과 소총의 탄환이 향했다. "드드드" "탕탕탕"
 

괭이바다에서 국화꽃을 던지는 유족들 ⓒ 박만순

 
괭이바다에 산 채로 내던져진 이진채(가명)는 정신을 차리려 심호흡을 했다. 바다 속이라고 안전하지는 않았다.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총알이 "피융"하며 몸 옆으로 지나갔다. 순간 '뜨금' 했다. 혹시나 총을 맞았나 했지만, 다행히 허리를 묶은 밧줄을 스쳐 지나갔다.

팔이 자유로워진 이진채는 잠시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탕탕탕" 요란한 총소리에 도로 바다 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는 군함 바닥으로 헤엄쳐 돌출된 부위를 잡았다. 그렇게 상황이 끝난 후에 그는 군인들 눈에 띄지 않도록 헤엄쳐 설진리 해안에 닿았고, 곧장 부산으로 도망쳤다.

이진채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마산시 보도연맹원 1681명은 1950년 7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전차상륙함에 실려 수장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전차상륙함을 동원한 군 작전은 적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비무장한 같은 민족을 학살하기 위해서였다.

보도연맹원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사형' 선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20일 후인 1950년 7월 15일. 경남 마산시에 소재한 강남극장에 마산시와 창원 지역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었다. 당시 경남 창원군 북면 화천리에 살았던 박영조도 거기 있었다.

이들은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었고 CIC(미군 24군단 첩보부대)는 보도연맹원들을 A, B, C 등급으로 분류했다. CIC의 작업이 끝나면 헌병대 지휘 아래 경찰과 마산형무소 형무관들이 A등급 인사들을 감옥에 쳐넣었다. B, C등급을 받은 이들은 감방이 부족해 형무소 마당에 앉아서 여름밤을 지새웠다. 그러다가 A등급 인사들이 감옥을 비우면 B등급이 그곳을 채웠다.

A등급으로 분류된 박영조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한 당시 마산형무소에 수감된 기결수나 미결수가 아니었기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 그는 1948년 단독정부 수립 후 시위에 참여한 일로 감옥살이를 하고 1950년 1월 26일 만기출옥했다. 그 사이 첫째 부인 조덕순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조덕순은 남편이 연행되기 전 창원군 북면지서에 끌려가 "남편의 소재를 대라"며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1948년 6월 중순 사망했다. 경찰의 고문치사였다.

1년 6개월 감옥살이를 한 박영조는 석방 후에 강제적으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자 예비검속되돼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쟁 후 그는 어떠한 실정법도 위반하지 않았는데 전쟁 전 행위로 이중처벌을 받은 것이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 법적용이었다.

재판 절차도 엉망이었다. '마산계엄고등군법회의'의 경우 심판관이 5명 이상이어야 하는데 한 명에 불과했다. 또 검찰관 한 명이 하루에 159명을 심리해 대부분 사형을 구형했고, 판사도 검사가 구형한 대로 선고했다. 이 불법적인 군법회의에서 박영조뿐만 아니라 노상도가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괭이바다에 수장되었다.

이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군법회의가 '불법'임이 밝혀지는 데는 70년이 걸렸다. 2020년 2월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은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했다. 재심을 청구한 지 7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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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오후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이 70년 전 한국전쟁 전후 일어난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 희생자 재심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선고 했고, 이후 경남유족회 회원들이 법원 민원실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윤성효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은 형무소 재소자 

1949년 11월 8일 마산시 양덕동에 있던 마산형무소 연와공장에서 죄수들이 집단탈옥했다. 이 공장에서는 빨간 벽돌을 만들었다. 그날도 간수 10여 명이 작업을 마친 재소자 100여 명을 데리고 오고 있었다.

그런데 재소자 한 명의 "뒤로 돌아"라는 소리를 신호로, 재소자들은 간수들의 총을 빼앗고 탈옥했다. 대부분 3년 이하의 단기수였던 재소자 백여 명은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의 각드미산으로 도망갔다. 도로 붙잡히는 과정에서 반항한 재소자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또 다시 잡혀온 재소자들은 형기가 연장됐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괭이바다에서 수장되었다.

왜 그들은 죽음을 무릅쓴 탈옥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마산형무소뿐만 아니라 전국 형무소의 시설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시작된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18개 형무소 수감자는 2600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46년 7월에는 1만7000명을 초과했으며, 1948년 봄에는 2만2000여 명을 상회했다. 1948년에는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등으로 수형자가 급증, 1949년에는 인천소년형무소를 포함한 19개 형무소에 3만5119명이 수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이승만 정부의 '채찍정책'은 전국의 감옥을 과포화 상태로 만들었다. 이렇다 보니 재소자들은 서로 머리를 반대편에 두고 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도 편히 누울 수 없었고 이른바 '칼잠'을 자야 했다. 서로 몸을 비틀어 어깨가 깔리는 형국이었다. 아침이 되면 여기저기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났다.

어떤 곳에서는 교대로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특히 질식에 빠진 곳은 대구형무소였는데, 1949년 8월 현재 1500명 정원에 수용인원이 3068명이었다. 재소자들은 강당, 창고, 작업장을 감방으로 썼다.(<서울신문> 1949년 8월 7일자 기사) 1950년 1월에는 전국 19개 형무소에 4만8000여 명의 재소자가 수감됐다.

재소자 식사도 형편없었다. 1949년 6월 대구형무소에서는 한 달 동안 재소자 6명이 굶어 죽었다. 때문에 재소자들은 목숨을 건 탈주를 감행했다. 마산형무소뿐만 아니라 1949년 9월 14일에는 목포형무소에서 400명이 탈옥했다. 

면사무소에서 학력 위조해

박재홍(1950년생, 박영조의 아들)은 면사무소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어이, 김 주사 어찌 된 일인교?" "어, 박형 왔는가." "박형이고 뭐고 간에 내가 와 입대한 기가?"

경남 창원군 북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김진수(가명)는 불청객(?) 박재홍의 출현에 적잖이 놀랐다. 작년에 경북 영천에 있는 제3사관학교 기간병으로 간 박재홍은 원래 입대 대상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관내에 입대 병력이 부족하자 김진수가 박재홍을 중학교 졸업자로 학력을 위조해 현역에 입대시킨 것이다.

당사자가 1년 만에 나타나 거세게 항의하니 김진수는 안절부절했다. 박재홍은 울화가 치밀었는데, 군대 간 것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 박영조가 6.25 때 학살돼 자신을 '빨갱이의 자식'이라 손가락질을 하면서도 정작 국방의 의무는 위법적으로라도 지게 하는 국가가 괘씸했던 것이다.

그는 평생 연좌제 탓에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입대 전에는 동국제강, 도남모방같은 영세회사를 잠깐씩 다녔지만, 제대 후에도 청과시장에서 막일을 했다. 최근에는 택시 일을 하면서 유족회 일에 참여하고 있다. 박재홍은 한시도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아버지를 불러본 적이 없었던 박재홍은 올해 위령제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불러 보았다.

박재홍과 마찬가지로 6.25 때 아버지 노상도를 마산 괭이바다에서 잃은 노치수(1947년생)는 현재 경남유족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시 '괭이바다'에서 1681명의 수장사건을 역사적으로 복원했다. 다음은 시 '괭이바다'의 일부다.

마산만을 지나 / 진해만의 끝자락에 /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파도가 /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 푸르디푸른 바다 //
밤이면 밤마다 / 거센 파도와 함께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 괭이바다 //
미군함정이 오가던 길목 / 너울너울 춤추는 파도는 / 애절한 몸부림인가 / 통한의 외침인가 // (중략)
독립운동가도, 사상가도 / 선생도, 학생도 / 이 땅을 지켰던 농민도 / 광란의 총칼에 / 팔팔한 생명들이 모두 / 피를 토하며 파도에 밀려가고 / 고귀한 영혼은 흩어졌다 //
인간의 존엄도 / 생명의 자유도 / 송두리째 수장시켰다. (2020년 6월 15일자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노치수의 시 「괭이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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