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일기와 함께 떠나는 조선 사림의 꿈과 일상

땅끝 해남에서 사대부로 출생한 미암 유희춘

등록 2020.11.16 14:00수정 2020.11.3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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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통해 16세기 사림시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사림들의 일상사를 살펴 봄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편집자말]

윤두서의 고사독서도 16세기를 주도한 것은 지방에서 학문을 배워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한 사대부 출신의 사림들이었다.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가장 발현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 정윤섭

 
조선시대를 통해 16세기를 보통 사림정치기라 한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사림시대가 차지하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사림(士林)'은 일반적으로 고려 말 신진사대부로 등장했다가 훈구파와의 정치적 대립 속에서 주로 지방에 근거를 두고 유향소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오다 중앙정계에 진출, 16세기 조선사회를 주도한 세력을 말하고 있다.


이 시기를 주도한 사림은 우리에게 많은 시대적 상징성을 느끼게 한다. 사림은 보통 16세기의 사화와 당쟁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부대끼며 성장, 결국 정치적 목적을 이룬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선비'라는 지적 탐구자가 사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선비는 보통 '대쪽 같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불의에 항거하는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선비다. 조선사회의 주된 이념이었던 성리학을 주도한 계층은 신분적으로 지배계급에 속한 양반사대부들이었다. 선비는 주로 이들 식자층을 대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는 피 비린내 나는 4대 사화가 일어났던 때다. 그 사화의 중심에 서있던 왕 중에는 폭군으로 일컬어지는 연산군(1494~1506)이 있다. 성리학적 가치를 따르는 사림들은 연산군을 퇴위시키기 위해 반정혁명을 일으켰다. 군주가 제대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쫓아내도 된다는 맹자의 역성혁명 사상의 결과였다. 이는 성리학을 통해 이상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던 사림들의 실천적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림들이 목숨을 걸고 백성을 위한 정치(덕치)를 베풀지 못한 군주(연산군)를 폐위시킨 것은 이들의 시대적 소명이었다. 이는 선비정신이 추구하는 가장 상징적 행동(의사표현)이었으며 성리학적 명분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이처럼 선비 정신이 나타난 것은 16세기 4대사화의 대 참화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들의 소신을 지켜낸 사림들의 '의'를 향한 실천적 일념 때문이라 생각된다.

물론 이들이 나중에는 붕당이나 당파싸움의 와중에 실천보다는 의리나 명분 등을 쫓다가 관념적인 이념으로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 가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16세기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 했던 불퇴의 정신, 대쪽 같은 선비정신을 추구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시기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격렬한 권력투쟁의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사림들은 새로운 사회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그것을 실천하려 하고 있었다.


사림을 위한 변명

16세기는 조선시대를 통해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를 주도하며 살았던 이들은 양반, 사족, 선비, 사대부, 사림으로 불리는 이들로 이들은 대체로 조선사회에서 지배계층에 서 있었다. 지적 소양을 갖춘 식자층인 이들이 조선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살았던 시기였다.

16세기 사림들을 평가하는 데에는 여러 한계가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몇 가지 예를 통해 이들이 남긴 시대적 소명과 성과를 평가해 볼 수 있다. 첫째, 사림은 성리학적 가치를 통해 실천윤리를 강조하며 기존의 사회현실을 개혁하고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려 하였다. 16세기에 일어난 4대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대립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선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새로운 사회개혁과 사회윤리를 실현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된다.

둘째, 이 시기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절대적 상하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견제하며 이를 통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활발한 언관(론) 활동이 이루어진 시대였다고 본다. 또한 오늘날의 지방자치처럼 유향소와 같은 향촌 자치조직을 통해 지방자치주의를 실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셋째, 이 시기를 통해 나타난 눈부신 사상사의 발전으로 사화라는 갈등과 논쟁만큼이나 활발한 '사상의 발전'이 이루어진 지적 탐구의 시대였다. 우리가 잘 아는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기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학자와 인물들이 탐구와 사상논쟁 속에서 학문적 성과를 이룬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정신, 사상사적으로 풍부한 성과를 남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지방에 세워진 큰 규모의 서원과 사우는 대부분 이 시기의 인물들을 배향하고 있어 이를 잘 뒷받침 해준다.

이 시기 성리학을 줄기로 하여 치열하게 전개된 정치와 학문, 사상사의 전개는 이 시대를 살았던 사림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남쪽의 궁벽한 해남 땅에서 태어나다  

유희춘이 <미암일기> 미암일기는 선조실록을 편찬할때 사료가 될만큼 국가적인 사건을 꼼꼼히 기록하기도 하였다. ⓒ 정윤섭

  성리학이라는 정치사상 또는 이념을 기반으로 하여 살았던 16세기의 사림들은 어떻게 성장하여 그 시대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16세기를 살았던 사림의 일상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 중에 미암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가 있다.

<미암일기>는 1567년 10월부터 1577년 5월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쓴 조선시대 개인일기 중 가장 방대한 일기로 알려져 있다. 왕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궁중생활의 일면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향촌생활과 관직생활, 경제활동, 사회 문화 활동의 영역에 이르기 까지 아주 다양한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딱딱한 사실적 기록에 비해 <미암일기>는 16세기 사림들의 일상을 아주 흥미 있게 관찰해 볼 수 있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으로 1592년(선조 25) 이전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불타 없어져<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할 때 <선조실록> 첫 10년간의 사료(史料)가 되기도 했다.

<미암일기>의 저자 유희춘은 지방의 사대부(재지사족)로 성장하여 16세기에 활약한 전형적인 사림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암 유희춘의 삶의 궤적과 그가 남긴 <미암일기> 속의 일상을 찾아가다 보면 16세기 사림을 만나볼 수 있다.
 

진산 금강산을 배경으로 들어선 해남고을 미암은 당시 가장 변방이랄 수 있는 해남고을에서 태어나 학문을 통해 중앙의 관직에 진출 사림으로 성장한다. ⓒ 정윤섭

 
미암 유희춘하면 많은 사람들은 담양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미암이 태어난 곳은 해남이며 그가 재지사족으로 성장 사림의 일원이 되가는 과정은 해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해남읍내 뒤편은 해남의 진산인 금강산(488m)이 자리하고 있다. 해남향교 뒤 금강산을 오르는 중턱쯤에는 눈썹바위라고 하는 '미암바위'가 있다. 미암 유희춘의 호는 이 미암바위에서 연유하고 있다. 해남향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유희춘이 살았다는 유허지가 있다.

그가 살았다는 것에서 연유한 것인지 그곳에 지어진 아파트 이름도 '미암아파트'다. 이곳에서는 미암바위가 곧바로 올려다 보인다. 뒷산의 이름도 나이든 어른들은 '미암산'이라 불렀다. 이처럼 미암을 딴 상가나 건물의 이름은 지금도 간혹 눈에 띈다.
 

미암 유희춘의 생가터 미암 유희춘이 태어났다고 하는 생가터로 그곳에 미암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뒷산 중턱에는 자신의 호를 땃다고 하는 미암바위가 보인다. ⓒ 정윤섭

 
그가 태어나 재지적 기반을 다진 해남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땅끝이라는 곳이다. 해남은 문풍이 별무하고 우리나라의 가장 끝이라는 변방에 위치하고 있어서 중앙으로부터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고려 때 까지만 해도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거의 없다.

이 때문인지 통일신라시대에는 남쪽의 궁벽한 곳이라 하여 '침명(浸溟)' 또는 '투빈(投濱)'이라 하였다. 또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해남은 서울서 너무 먼 곳에 있고 남해에 육박해 있는데다 바다 기운이 무더워서 병이 나기 쉽고 일본에 대단히 가까워서 토지가 비록 기름지다 하지만 사람이 가히 즐겨 살 곳이 못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 외진 변방의 땅 해남에서 태어난 미암은 어떻게 성장하여 관직에 진출 16세기 사림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덧붙이는 글 정기적으로 연재 형식의 글을 쓰고자 합니다
#사림 #선비 #사대부 #유희춘 #미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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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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