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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유명한 부둣가, 이름은 '파주길'

경기도 파주시의 자매도시 글로스터... 그곳을 걸으며 느낀 단상

등록 2020.11.21 11:56수정 2020.11.2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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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스터 부둣가에서 ⓒ 김성수


지난 2001년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 있는 영국군 참전추모시설을 찾은 적이 있다. 이곳에는 글로스터 전투 추모비(Gloucester Valley Battle Monument)가 있었는데 이 추모비는 한국전쟁 당시 설마리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들의 넋을 기리고자 우리 정부에서 건립한 추모기념시설이었다.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이어진 중공군의 공세를 맞아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이곳에서 불과 652명의 병력으로 4만2000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공세를 나흘간 저지해냈다. 영국군이 이곳에서 시간을 벌어준 덕에 유엔군은 중공군 공세의 추진력을 꺾을 수 있었고, 결국 서울 북쪽으로 유엔군이 철수해 중공군에 대한 방어 작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에게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다. 이 전투의 공로로 영국군은 '영광스러운 글로스터(The Glorious Gloucester)'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652명의 영국군 전투원 가운데 전쟁포로를 포함해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겨우 67명에 불과했다.

지난 2001년 당시 이곳에서 나와 우리가족은 6.25전쟁 중 영국 군인들의 희생을 생각하며 참전비에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 나중에 아버지는 내게 "(영국) 며늘아기가 묵념 중에 눈물을 흘리더구나"라며 귀띔을 해주셨다.

그리고 그후 20년의 세월이 쏜살 같이 흘렀다. 아내와 나는 파주의 영국군 글로스터 참전시설을 아이들과 함께 방문한 것을 까마득하게 잊었고 분주한 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글로스터 성당 앞에서 ⓒ 김성수

  
지난 10월 아내와 나는 영국생활 30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글로스터시를 찾았다. 이곳에서 우리 부부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글로스터 성당을 방문했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몇몇 어르신들과 많은 '노상담화'를 나눴다.

글로스터 성당은 11세기에 지어졌고 영화 <해리포터>를 촬영했던 유명한 곳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리는 어두운 중세성당 안을 묵묵히 거닐었다. 눈부시게 밝고 아름드리 장식된 성당의 맑은 유리창을 통해 갑자기 강렬한 햇빛이 내 눈에 비친 순간 마치 온 세상이 일순간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성스러운 성당과 강한 일치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일체감에 나는 순간이나마 무아지경이 됐다. 성당 통로에 서있는 동안 나는 문득 미국 소설가 윌리암 포크너(1897~1962)의 "과거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글과 러시아 작가 유리 트리프노브(1925~1981)의 "역사는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가운데 있다"는 글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글로스터의 과거 역사와 강렬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몰려왔다.


한국 파주시와 자매도시인 영국 글로스터시
 

글로스터 파주길 명판 앞에서 ⓒ 김성수

 
글로스터 부둣가를 걷다가 나는 글로스터시가 한국 경기도 파주시와 자매도시이고 그래서 이 부둣가의 길을 '파주길'로 명명한다는 명판을 우연히 발견했다. 무척 기뻤다. 타향에서는 고향의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속담이 있다. 이 명판을 보는 순간 나는 20년 전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한 번 방문하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 있는 영국군 글로스터 참전추모시설이 불현 듯 생각났다. 그리고 지난 2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가고 내 가슴은 금방 반가움에 쿵쾅거렸다.

6.25 전쟁 당시 영국군 글로스터 부대가 이곳 글로시터시에서 온 부대였다는 것을 이날 처음 알았다. 지난 2014년 파주시는 글로스터시와 자매도시가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2016년 파주시는 감악산 출렁다리를 '글로스터 영웅의 다리'라고 명명했고 글로스터시는 이곳의 유명한 부둣가를 '파주길'로 명명했다. '파주길' 앞에서 나는 한국과 처갓집인 영국간의, 또 동양과 서양간의 문화와 인종을 넘어선 강한 결속력과 일체감을 느꼈다.

그후 아내와 나는 코로나19 때문에 조용하고 한적한 글로스터 시내 한복판을 걸으며 시내 이곳저곳에서 영국 어르신들을 만났다. 한 영국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한국사람이냐고 물었다. 보통 영국에는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한국사람보다 훨씬 많아서 단번에 동양인을 보고 한국인이냐고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 할머니에게 어떻게 아셨느냐고 물었다.

그 할머니는 젊은 시절 미국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한국인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후 남자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영국으로 돌아온 후 세월이 흐르다가 결국 서로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자신은 그 후 영국 남성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고 아이들은 독립하고 지금은 손주도 있는데 얼마 전 남편과는 사별했다고 한다. 초면인 우리는 마치 오랜 벗처럼 노상에서 꽤 오랜 대화를 나눴다. 이런 사연으로 이 할머니는 나를 보고 금방 한국사람 일 것으로 추정했다고 하신다. 참, 놀라울 뿐이다.

할머니와 헤어지고 글로시터 시내를 걷다가 아내와 나는 또 다른 영국 어르신들을 길에서 만나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장시간 '노상담화'를 나눴다. 우리들은 다 초면이었지만 오랜 친구처럼 즐겁고 반가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대화주제는 아무래도 코로나19, 글로스터의 역사, 요즘의 세계,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기이한 언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 할머니는 '사람 얼굴은 자기가 먹는 음식과 비슷해진다'면서 햄버거를 좋아하는 트럼프는 그래서 생김새가 햄버거 위에 노란 치즈를 올려놓은 것과 똑같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리는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박장대소했다. 그 와중에 아내는 자신이 먹던 오렌지 초콜릿을 그 할머니가 안 보는 사이에 살짝 핸드백 속에 넣었다. 나도 먹던 치즈버거를 할머니가 안 보실 때 바지주머니에 슬쩍 감췄다.

즐거운 대화를 뒤로하고 아쉽게도 우리는 "굿바이" 하고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이제는 글로스터시도 황혼이 서서히 깔리고 있었다. 어둠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니 너무 외로워 보이셨다. 코로나19로 인한 오랜 자가 격리와 봉쇄생활로 어르신들이 특별히 고독감을 많이 느끼시는 것 같아 헤어지고 숙소로 아내와 걸어오면서 우리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혼자서는 못산다
  

코로나19로 인적이 한적한 글로스터 시내 ⓒ 김성수

 
요즘은 개인주의가 횡횡하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혼자서는 못살고 남과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수다 떨고, 밥 한술, 술 한 잔 함께 하기를 간절히 그리워한다. 우리의 삶과 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사회적 환경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것을 그래서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 환경의 부산물인가 아니면 자기노력의 부산물인가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삶의 행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이 살았던 시대를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봄은 꽃 한 송이가 달랑 핀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백화가 만발하면 자연스레 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화도 한 인간이 혼자서 개인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만이 아닌 사회 전체, 인류 전체가 함께 상호 보완하고 주고받으며 발전, 발달, 전진하는 것이 곧 진화다.

사상가 함석헌(1901~1989)의 말처럼 진리란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독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독점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 사이의 관계는 서로 간의 생각과 현실의 틈을 이어주고 보완해주는 결정적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하등동물이나 저급한 사회일수록 단세포적이고, 규격화되며 일사불란과 일심동체를 강요한다. 반면 고등동물이나 높은 수준의 사회일수록 다양한 개성이 존중받고 다원적이며 서로간의 다름에 대해 풍부한 관용이 넘쳐난다.

마치 구리와 아연이 합쳐져서 전혀 새로운 제품인 황동을 생산하듯이, 획일적 인간보다는 여러 다양한 인간들이 조화를 이뤄 살다보면 인류의 수준을 더 높은 단계로 상승시킬 수 있다. 마치 인간의 두 다리가 분리돼 있고 서로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두 다리가 서로 보완하며 한 인간이 곧게 서서 앞으로 걷게 하기 위해서 작동하듯이, 남과 여, 음과 양, 이성(理性)과 감성도 결국 상호보완하고 조화를 이루며 인류를 전진시킨다.

종교는 인간정신의 위대함, 그리고 인본주의와 인도주의를 통해서 절대자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현실에서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는 종교행위는 마약중독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개인의 영적 추구와 사회정의를 위한 분투는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거시적으로 보면 코로나19와 그에 따른 전 세계의 봉쇄조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오히려 실보다는 득이 되는 것 같다. 코로나19로 인한 오랜 동안의 봉쇄조치로 우리 인간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생태계는 복원되고 지구 온난화는 둔화되고 있다. 그동안 멸종했다고 여겨졌던 동식물들도 지구촌 곳곳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지구의 다른 생명체 입장에서는 자연과 환경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인류가 오히려 코로나19보다도 훨씬 더 독한 슈퍼바이러스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생명체를 다 파괴하고 인간이란 종자만이 지구에 독야청정 나 홀로 살 수는 없다. 좋으나 싫으나 인간, 동식물을 포함한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는 전부 상호 연결된 떨어질 수 없는 유기체인 것이다.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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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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