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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류보리 작가가 '주변인물' 성별을 지정한 까닭

[인터뷰]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류보리 작가

20.11.16 14:17최종업데이트20.11.1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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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스틸 컷 ⓒ SBS

 
"결국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아래 <브람스>)는 클래식 음악학도들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었다. 드라마 속에는 재능이 부족해서, 부모님의 빚 때문에 또는 친구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스물아홉 살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로 흔들리면서도 결국엔 난관을 이겨내고 새로운 한 발짝을 내딛는다. 

스펙타클한 사건사고, 자극적인 설정 없이도 <브람스>는 잔잔하게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리면서 '웰메이드'라는 호평을 얻었다. 종영 직후 류보리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브람스>는 어렵고 낯선 클래식 소재를 정면으로 다룬 데다, 주인공이 성공하는 스토리가 아니라 무언가 포기하고 내려놓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느 드라마와 달랐다. 그러나 탄탄한 팬층을 형성한 <브람스>의 새로운 도전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류 작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평소에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장애물을 뛰어넘어 달려가는 인물들보다 목표를 아직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혹은 목표는 있지만 그 목표를 달성해야하는 목적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인물들과 그 감정에 마음이 많이 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리 애써도 닿지 않는 마음', '해도해도 되지 않는 것들'에서 '(오랜) 짝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좁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으로 좀더 구체화시키다가 클래식 음악을 떠올렸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것들이니까."

극 중에서 채송아(박은빈 분)는 명문 경영대를 졸업하고 뒤늦게 바이올린을 시작한 늦깎이 음대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켰던 동기들에 치여 4년 내내 꼴찌를 면치 못했던 채송아는 모자란 시간과 재능의 한계를 알면서도 바이올린을 너무 사랑하기에 놓지 못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들은 채송아의 모습을 답답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류보리 작가는 "송아가 바이올린이라는 오랜 짝사랑을 '힘겹지만 용기있게 보내'주면서도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행복을 찾고 성장한다는 기획의도는 1회부터 16회까지 대본을 끌고간 중심축이었다"며 "바이올린을 향한 송아 마음의 진정성과 깊이의 측면에서 송아는 바이올린을 빠르게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드라마 최종회에서 채송아는 바이올린을 떠나보내고 클래식 공연 기획자로서의 길을 택한다. 1회에서 빛나는 오케스트라 무대에 서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던 채송아는 당당하게 무대 위로 걸어가며 엔딩을 맞이한다. 류 작가는 이 엔딩 장면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대본을 써왔다고 고백했다.

"송아가 여러 가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 때문에 떠밀려서 바이올린을 포기하는 상황을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송아는 여러 힘든 일을 겪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저는 송아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어떻게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드리고 싶었다. 16회 엔딩은 1회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음에 그리고 있던 장면이었고, 그래서 중간중간 조금씩 (집필이) 힘에 부칠 때마다 이 엔딩 장면을 반드시 시청자분들께 잘 다가가게 쓰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스틸 컷 ⓒ SBS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 2등(1등 없는 2등)을 차지한 피아니스트이지만 자신의 재능을 사랑하지 않는 박준영(김민재 분)은 <브람스>의 또다른 축이었다. 어린 시절 집안 사정 때문에 예술중학교를 자퇴하려 했던 박준영은 피아니스트 정경선의 사고사 이후 그 보험금으로 설립된 경후문화재단 1기 장학생으로 선정되면서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박준영은 정경선의 딸이자 오랜 친구인 이정경(박지현 분)과 경후재단에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류보리 작가는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완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면서도 "이 극은 멜로인 동시에 청춘들의 성장물이기 때문에 준영은 완벽한 왕자님이 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류 작가는 준영의 성장에 대해서도 덧붙여 설명했다.

"준영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돌본 적 없이 부채감에 짓눌려 살아왔다. 타인을 위한 연주를 해오던 삶에서 결국 자신의 마음과 욕망을 들여다보게 되고,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한 연주보다 자신의 마음에 우선적으로 충실한 연주를 하게 되는 게 준영의 성장이었다. 이 변화를 요약한 문장을 작업실 화이트보드에 써놓고 매일 몇 번씩 읽었는데, 이것이 제가 준영에게 주고 싶은 행복이었다."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스틸 컷 ⓒ SBS

 
현실적이고도 입체적인 인물 설정뿐만 아니라, <브람스>는 교수들의 기싸움이나 체임버, 작은 선생 등 음대 세계를 현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더욱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실제로 서울대학교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류보리 작가의 이력 역시 덩달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류 작가는 앞서 여러 인터뷰를 통해 경험담을 쓴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드라마 속 음대의 세계는 배경이 음대일 뿐, 사회 어느 곳을 잘라보아도 기성세대의 부조리함과 불합리, 권력의 암투 등은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드라마 속 사건들은 제가 겪거나 취재를 한 내용이 아닌데도 현실적이라 느껴지셨다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더라. 한편으로는 드라마가 추구하고자 했던 사실같은 톤이 잘 표현되었나 싶어 좋기도 하다가도, 이런 어두운 면들을 현실적이라고 해주시는 부분에서 마음이 어두워지기도 한다.  

이 드라마는 판타지를 거의 배제하고 쓴 드라마라, 이런 기성 사회의 어두운 면들이 결말에서도 확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어른들 중에서도 누군가는 조금이나마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렇다면 이 사회가 느린 속도로라도 조금씩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이러한 드라마 속 디테일까지 고민 끝에 탄생한 <브람스>에서 류보리 작가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다름 아닌 주인공들의 부모에 관한 설정이었다고. 드라마에는 딸의 힘든 선택을 단단하게 지지해주는 채송아의 부모부터, 늘 사고를 치느라 아들에게 빚만 얹어주는 박준영의 부모, 아내를 잃은 이후 애도 속에 사는 정경의 아버지 등 다양한 모습의 부모들이 등장한다. 

"송아와 현호(김성철 분)가 준영이나 정경보다 단단한 아이들인 것은 분명 이 둘이 가정에서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유가 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모로 대비되는 가족 상황을 설정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다. 꼭 좋은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만이 밝고 단단하게 자라는가, 하면 그건 아니니까. 그래서 준영의 경우 차영인이라는 사람 덕분에 이만큼 바르고 심성 곱게 자란 것으로 설정했다. 극 중에서 그런 내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어 류보리 작가는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TV드라마라는 대중매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편견을 조장하거나 강화할 수 있는 메시지가 들어가는 것은 늘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주변 인물들의 성별 설정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브람스>의 주변인물들을 쓰면서 또 하나 제가 신경쓴 부분은 주변인물들의 성별이었다. 2회에 나오는 지휘자는 반드시 여성으로 하고 싶어 대본에 성별을 지정했다. 흔히 지휘자라고 하면 남성을 떠올리고 실제로도 (아직까지) 지휘는 남초 직업군이다. 하지만 분명 훌륭한 여성 지휘자들도 있고 점점 젊은 여성 지휘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잠깐 내한한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설정이자 준영에게 인생의 화두를 던질 중요한 이 역할에게 꼭 여성의 성별을 주고 싶었다. TV 드라마라는 콘텐츠에서 여성 지휘자의 모습이 짧게라도 보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제가 드라마에서 여성 지휘자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예중 토크콘서트에서 아주 짧게 보이는 피아노 조율사도 여성으로 지정했다. 재단 이사장 문숙의 성별이 여성인 것도, 문숙-경선-정경으로 이어지는 여성 3대를 그리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 옛날에 남자 형제들을 제치고 그룹을 물려받아 회장 자리에 올랐던 여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이유도 크다. 이런 것들은 아주 작은 부분들이지만 제가 쓰는 작품이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미래를 향해'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늘 신경쓰고 의도하려 한다."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스틸 컷 ⓒ SBS

 
서른을 앞둔, 20대와 30대 그 경계에 선 인물들을 그린 <브람스>는 특히 또래의 청춘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고민하거나, 피나는 노력 끝에 피아니스트가 됐지만 끝없는 경쟁 때문에 고통받는 등 클래식 음악 세계가 배경이지만 드라마 속 인물들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류보리 작가는 배우 윤찬영이 특별출연했던 피아니스트 승지민 캐릭터가 특히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승지민은 박준영에 이어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 1위를 차지하며, 앞서 1위 없는 2위에 오른 박준영의 입지를 약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류 작가는 "극 후반부에 김규희라는 (콩쿨에 우승한) 또다른 신예 피아니스트를 등장시킨 것도 그런 '끝없는 경쟁'의 맥락에서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도 끝없는 경쟁 상황에 놓여 있을 청춘들에 대한 위로를 전했다.

"저는 결과만큼이나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로만 판단되는 상황을 보면 참 슬플 때가 많다. 요즘은 늘 남과 경쟁, 비교를 당하며 살아가게 되고, 1등을 했다고 행복한 것도 한 순간일 만큼 무한 경쟁에 시달리는 시대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비교와 경쟁의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이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거나 그런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갈 순 없지만, 내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을 찾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하는 나를 아낀다면 그 시간이 쌓여 결국에는 나의 미래를 이루는 바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2020년은 유달리 신인 드라마 작가의 열풍이 거셌던 한 해였다. SBS <스토브리그>의 이신화 작가, <아무도 모른다> 김은향 작가, JTBC <검사내전> 이현, 서자연 작가, MBC <꼰대인턴>의 신소라 작가, 넷플릭스 <인간수업>의 진한새 작가. 이들은 모두 새로운 시각, 신선한 설정으로 많은 드라마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올해 드라마계에 나타난 신인 작가들에 대한 분석이 쏟아지는 이유다. 류보리 작가 역시 단편극 < 17세의 조건 > <외출>에 이어 <브람스>로 장편 데뷔한 신인으로 이 열풍에 합류했다.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스틸 컷 ⓒ SBS

 
류 작가는 신인 작가 열풍에 대해선 "신인 작가건 경력 작가건 어떤 작품의 성공 이유에는 정말 많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성공'이라는 말의 뜻도 이제는 모두가 동의하는 기준으로 정의할 수 없다"며 조심스레 답했다. 

서울대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대에서 공연예술경영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뉴욕 필하모닉 마케팅부와 소니뮤직 마케팅부에서 근무하는 등 류보리 작가는 화려한 이력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회사를 다니며 일에서 재미와 성취는 느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보다 좀 더 의미있는 삶을 살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드라마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이어 신인작가 대열 합류를 꿈꾸는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에 대한 질문에, 류 작가는 드라마 속 채송아의 대사를 인용하며 진중한 답변을 내놓았다.

"드라마를 쓰시는 분들 모두 글을 쓰는 이유가 각자 다르고, 쓰고 싶은 글이나 상황도 모두 다를 것이라 뭔가 말씀드리기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브람스>에서 송아의 입을 빌려 말했던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면 우리는 음악을 하기로 선택했으니까요'라는 말은, 드라마를 쓰기로 선택한 제 스스로에게 늘 해주었던 말이기도 하고 지금도 계속 되뇌이는 말이다. 무엇을 하든 스스로의 마음을 믿고 자신이 그 일을 선택한 이유나 그 일의 가치를 믿는 것이,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야 혹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 힘내어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브람스를좋아하세요 류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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