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로 힘든 청소년들에게 건네는 위로

[서평] 이은용 장편소설 '우리가 만난 시간'

등록 2020.11.06 09:09수정 2020.11.0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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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생인 서율이는 어느 날 엄청난 일을 겪는다. 은찬이네 집에서 친구들과 모여 논 후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다 사고가 난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일요일 새벽 인적이 거의 없는 공사장에 내동댕이쳐지는 바람에 몇 시간 지나 죽은 듯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3일 후 깨어나지만 기억을 잃고 말았다.

친구들에 의하면 각자 자신의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다가 자는 등 별일 없이 잘 놀고 있었는데 서율이가 혼자 느닷없이 나갔다는 것. 친구 도우 말에 따르면, 붙잡으려고 나갔을 때는 이미 자전거까지 끌고 나간 상태라 어쩔 수 없었고, 공부라도 하고 싶어 집에 가나? 생각할 정도로 아무 일 없이 놀았었다는 것이다.

서율이와 도우 둘 다 공부 잘하고 말썽 없는 모범생이다. 은찬이나 다른 친구들도 비교적 공부 잘하고 학교에서는 물론 일상에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평범한 아이들이다. 그래서 사고는 '브레이크 조작 등과 같은 단순한 실수로 인한' 정도로 일단락된다.

서율이는 본능적으로 기억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하다. 자신을 둘러싼 그다지 좋지 않은 것들, 어쩌면 차라리 모르는 게 좋을 것도 있을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특히 친구들을 떠올리면 급작스럽게 초조해지거나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벽 같은 것이 느껴져 더욱 그랬다.

사고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랬다. 궁금해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길고 긴 꿈(혼수상태)에서 만났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따뜻하게 대해주던 황세라를 거리에서 만나게 된다. 알고 보니 황세라는 불치병으로 1년 전에 이미 죽은, 서율이와 친했던 아이.

그런 세라와 꼭 닮은 연년생 동생 아라와 기억을 찾아 헤매던 서율이는 사고 얼마 전 자신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을 알게 된다. 아울러 사고를 부른 '방 탈출 게임' 그 진실도 알게 된다.

친구들의 말과 달리 새벽이 아닌 한밤중에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숨이 막히고 끔찍한 그 순간들을. 참아 주는 것으로 계속 장난같지만 실은 괴로움을 당했으며, 겉으론 친했지만 실은 왕따였던 자신을.
 

<우리가 만난 시간> 책표지. ⓒ 문학과 지성사

 
<우리가 만난 시간>(문학과 지성사 펴냄)은 사고로 기억을 잃은 한 소년이 본능적으로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청소년기의 성장통을 다룬 성장소설이다.

평범해 보이는 모범생 서율이. 그런데 사실 서율이의 상황은 그다지 무난하지 못했다. 서율이 부모는 얼마 전 이혼했다. 그런데 아무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 보다 어렸을 때, 일로 늘 바쁜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키워준지라 어쩌면 엄마보다 더 소중한 존재인 큰엄마를 잃은 상실감으로 힘들었다.

이처럼 가장 힘들 때, 옆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주눅들 정도로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들인 만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자신이 태어난 것부터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들도 그렇다고 생각하며 자포자기, 스스로 위로하고 참고 견디곤 했다.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대부분의 일에 무관심하게 됐다. 그래서 방관하거나, 적당히 합리화시키며 살아왔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의사를 확실히 밝히지 않았고, 다른 누군가가 부당한 일을 겪어도 나만 아니면 된다, 웃어넘기곤 했다. 공부 때문에 친구들을 견제하는 것도 당연하다, 싫어도 별생각 없이 어울리는 등 친구 혹은 사람 관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행복은 그런 걸 거야. 늘 반복돼서 그냥 지나치는 일들'
세라의 입에서 나온 '행복'이라는 말이 내 가슴을 물들였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꽃잎처럼 날아왔다. 한 번도 곁에 있다고 느껴본 적 없는 단어.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말. 일상으로 넘기던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하루가 모여 한 달이, 1년이 지나면서 되풀이되던 소소한 풍경들. 그 속에서 나는 자라고 변했지만 작은 것들이 모여 행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은 없었다. 작은 건 시시했다. 없어도 그만인 줄 알았다. 내게 있는 건 당연했고 갖지 못한 걸 바라보았다.-114쪽.

사고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까지 가게 된 서율이는 이미 죽었음에도 삶에 대한 미련과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나 그리움 등을 놓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수많은 영혼들과 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죽은 세라를 통해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삶의 소중함과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와 함께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한다.

재미로 하는 장난이 누군가를 상처받게 하거나, 영영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친구들과 모여 즐기곤 했던 것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엄청난 사고 그 시작은 부당한 일에 대한 무관심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의 합리화 같은 것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작정하고 모의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친구들만의 잘못만은 아니다, 이젠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게 밝히겠다, 내 문제에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부딪히겠다'라고 서율이는 생각한다. 
 
죽음에 가까워진 뒤로 과거를 되짚어본 적은 있어도 미래를 그려본 적은 없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가 똑같이 펼쳐질 거라는 예견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갖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무언지 아직 갈피를 잡을 수는 없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하나만 있어도 살아야 할 이유가 될 거야'
'절대 포기하면 안 되는 게 있잖아. 바로 너'

세라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호했다. 멈추었던 풍경들이 다시 움직였다. 나뭇잎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바람, 공기 그리고 향기.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느껴졌다. -157~158쪽.

사고가 난 그날의 진실은 끝쯤 밝혀지는데 거의 짐작하지 못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래서 기억이 까막까막한 서율이와 함께 기억을 찾아 알 듯 말 듯한 감정으로 읽게 된다.

중간쯤 누군가 서율이가 잃어버린 핸드폰으로 같은 반 여학생의 신체 부위들을 찍어 단톡방에 올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끝내 누구라고 밝히지 않아 결국 지레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한 청소년이 자신에게 드리운 문제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은 성장소설이지만 추리 소설을 읽을 때의 기분 좋은 긴장감까지 느끼며 읽은 소설이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은찬이가 그때 지하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서율이는 어떻게 됐을까?'

며칠째 맴돌고 있는 생각이다. 뉴스를 통해 접하며 안타까웠던 이런저런 이유로 삶을 포기했다는 여러 서율이들이 드문드문 떠오르며.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친구들의 왕따나 폭행으로 혹은 주변의 어떤 문제들로 힘든 시간을 홀로 견디고 있을지도 모를 서율이들을 위로한다. 소설 속 서율이처럼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길' 바라며.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계간 <우리교육> 2020년 겨울호에도 실립니다.

우리가 만난 시간

이은용 (지은이),
문학과지성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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