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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짓 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다급한 외침, 왜?

[로또교실 44] 코로나19 시기 아이들만의 거리두기 지키는 놀이

등록 2020.10.29 14:11수정 2020.10.2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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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아이들이 매일 등교해서 무척 기쁘고 겁이 난다. 현재 삼척시는 코로나19 확진자 0명. 지금까지 누적 환자는 1명인데, 지난 3월 4일 완치 퇴원 이후 추가 인원은 없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곳. 여기서는 먹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번져가는 가느다란 실금까지 생생히 드러나 보인다.

전교생이 등교한 학교는 긴장감으로 공기가 팽팽하다. 이 긴장감은 교사의 속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절대로 우리 반에서 확진자가 나와서는 안 돼!', 이것이 현재의 교실을 지배하는 진리다. 

책상은 시험 대형으로 점점이 흩어져 있고, 각 책상에는 불투명 칸막이가 요새처럼 서 있다. 쉬는 시간은 10분에서 5분으로 반 토막이 났고, 놀 권리를 위해 30분간 주어졌던 중간놀이 시간은 증발해 버렸다. 점심시간도 20분으로 줄어, 정규 수업을 제외한 기타 시간이 최소한으로 압축되었다. 학생 간 접촉 빈도를 낮추려는 방안이다. 

덕분에 6교시를 해도 오후 2시면 하교지만, 학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가 일찍 끝난다고 해서 학원 스케줄이 날아가는 건 아니다. 애들로서는 학교에 공부하러 와 줬으면, 노는 보상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힘들게 학교 나와서 공부, 잔소리, 공부의 조합이라니. 전혀 남는 장사가 못 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면 초등학생 자존심이 섭섭해한다. 그들은 아침 시간이라는 허점을 노린다. 
 

물이 반쯤 찬 페트병을 세우는 게 놀이의 목표다. ⓒ 이준수

 
탁! 탁!

8시 40분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김없이 물통 놀이가 한참이다. 아이들은 둥글게 앉아 원을 만들고 물통을 돌린다. 절반쯤 찬 물통을 공중으로 던져 똑바로 세우면 성공이다. 실패하면 다음 사람이 이어 하고, 성공해도 다음 사람이 이어 한다. 묘기 훈련에 가까운 무한 반복. 물통 던지기는 과거의 교실에서 행해지던 과격한 놀이에 비하면 단조롭고 지루하다. 그럼에도 올해 하반기 들어 상당한 기간 유행을 유지하고 있다. 나도 던져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가까이 갔다. 

"우리 거리 지켰어요!"

누가 뭐라나,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간 건데 대번에 "우리 나쁜 짓 하지 않았다"고 결백의 손짓을 한다. 거리를 지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학교에서 하도 "떨어져! 붙지 마!" 소리를 듣고 살아서 그런지 애들은 잔소리에 이골이 나 있다. 과연 다시 보니 플레이어 간 거리가 1m 떨어져 있다. 어깨동무도 하지 말라, 술래잡기도 안 된다 그러니 나름의 타협책으로 찾은 놀이가 물병 세우기였다. 

"온라인 수업 기간에 집에서도 연습했어요."
"유튜브에 레전드들 많은데."


하긴 반년을 집에서 지겨워 죽을 만큼 뒹굴었으니, 만만한 게 물병 아니었을까. 나도 기회를 얻어 물병을 던졌다. 물병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똑바로 서고 싶은 의지가 전혀 없는 물병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손끝 감각을 예민하게 세워 한 번 더 했다. 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간다. 그런데 옆에 앉은 T가 찌릿 강렬한 경고 신호를 보냈다. 맞다, 한 턴에 두 번의 기회. 놀이판에 낀 이상 나는 선생이 아니라 평등한 플레이어일 뿐이다. 물병을 옆으로 건넸다. 

2교시가 되었다. 영어 전담 수업이라 학생은 특별실에 가고 나 홀로 교실에 남았다. 오후 수업 준비를 하고 10분 짬이 생겨 유튜브를 켰다. 물병을 잘 세우고 싶은데 마음처럼 안돼서 고수의 영상을 찾았다. 검색어는 물통 세우기. 나만 빼고 전 세계 사람들이 다하는 놀이인 듯, 온갖 영상이 즐비하다. 서양인도 종종 눈에 띄어 검색어를 'water bottle flip'으로 바꾼다. 역시 덕후 중의 덕후는 양덕이라더니 3단 쌓기, 탁구공 결합 미션까지 나왔다. 

1.5배속으로 영상을 재생하였다. 핵심 노하우는 균형과 손목 스냅. 3천만 조회 수를 찍은 영상처럼 통나무 위에 올리는 건 불가능해도, 의자 정도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홉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의자 위 물통 세우기에 성공했다. 예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방역하랴, 수업하랴 양쪽 귓구멍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짜증이 났는데 오랜만에 순수한 몰입감을 만끽했다. 물통이 찰랑거리며 곧게 섰을 때, 그 짜릿함이란. 지구 중력은 인간에게 무한한 기쁨을 줄 수 있다.
 

초고수의 물통 뒤로 세우기. ⓒ 이준수

   
나는 전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교실 문을 열자마자 의기양양하게 물통을 들었다. 짧은 기합을 토하고, 준비해 둔 의자 위로 물통을 던졌다. 머릿 속 그림과 달리 물통은 자유의지로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쓰러진 물통을 주으러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은 차마 앞에서 나를 비웃지 못하고 등을 돌려 몸을 들썩였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썩을 녀석들, 승부의 세계는 이렇게 냉정한 것이다. 퇴근 후 집에 와서도 우리 집 애들하고 물통을 돌렸다. 여섯 살, 네 살짜리보다는 내가 더 잘한다. 큰 녀석은 내가 성공하면 막 화를 냈다. 그럴수록 나의 성취감은 높아만 졌다.

아, 이걸 우리 반 애들 앞에서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학교에 가야만 한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긋지긋한 월요병도 약한 수준에서 가라앉는다. 애들도 이 맛에 학교에 나오겠지.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 공용 정수기를 틀어막아도 물통은 돈다. 나는 지구가 멸망해도 우주로 도망친 초등학생에게 놀거리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데 내 모든 자산을 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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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교육, 그림책, 육아, 일상 주제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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