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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 신지도에서 터득한 이광사의 동국진체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11월 29일까지 동국진체 서화전 열어

등록 2020.10.28 08:08수정 2020.10.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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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형벌 중에 비교적 정치적 성격으로 내려진 것이 유배였다. 유배 중에서도 중죄인이 갔던 유배지는 섬이었다. 섬은 육지와 분리된 공간으로 한정된 공간속에 유폐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유배란 개인에겐 가혹한 시간이었지만 때론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창작의 시간을 갖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3백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고산 윤선도를 비롯 많은 선조들에게 유배지가 학문과 예술 창작의 산실이 된 것을 보면 유배라는 형벌도 간혹 필요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많은 유배지 섬 중에 서남해의 완도 신지도는 유배인들이 많이 왔던 섬 중 하나다. 신지도는 섬으로 귀양 보내는 절도정배지 7곳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신지도에는 약 46명의 선비들이 유배 왔다고 한다.

이름난 이들만 보면 송강 정철의 현손 정호(1648~1736)를 비롯 다산의 형인 정약전도 이곳에서 8개월간 살다 흑산도로 이배되었으며, <석재별고>를 쓴 윤행임과 시조를 많이 지은 이세보(1762~1801), 우두(牛痘)를 연구를 했던 지석영(1855~1935)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또한 조선후기 우리만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1705∼1777)도 유배생활을 하다 생을 마쳤던 곳이 신지도다. 신지도는 완도 본섬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지만 지난 2005년 다리가 연결되기 전까지는 고립된 섬이었다. 지금은 국립공원 구역으로 지정된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어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 명사십리 해수욕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이광사가 유배생할을 했던 적거지인 금곡 마을이 있다. 이광사는 이곳 신지도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우리만의 새로운 필법으로 인정받고 있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동국진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동국진체 전시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동국진체 서화전 옥동이서, 공재 윤두서,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 정윤섭

 
이광사가 완성한 동국진체의 흐름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기획전이 해남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에서 열리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은 동국진체의 맥을 잇고 있는 공재 윤두서의 회화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곳으로 이번 특별전은 '남도서화와 수묵화의 만남'이란 주제 속에 옥동 이서,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 맥을 잇고 있는 이들의 서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별전은 지난 13일 개막하여 오는 11월 29일까지 열리게 된다.

동국진체의 맥을 잇고 있는 이들을 보면 모두 이곳 녹우당이나 대흥사와도 매우 관계가 깊음을 알 수 있다. 동국진체의 길을 맨 처음 연 옥동 이서(1662∼1723)는 공재 윤두서와 매우 절친한 사이로 녹우당의 현판을 직접 지어 써준 이다. 현판 뒤에는 '戊午九月之卄有五日 刻顯 甲戌六月初七日(무오년 9월 25일에 새겨서 걸다. 갑술년 6월 7일)'이라 쓰여 있어 녹우당의 주인(종손)이 된 공재 윤두서를 위해 써준 것으로 생각된다.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현판 옥동 이서는 녹우당의 주인이었던 공재 윤두서와 절친한 사이로 현판도 그가 써준 것이다. ⓒ 정윤섭

 
동국진체를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옥동 이서다. 이서는 미수 허목이 창안한 서체가 널리 이용되지 못하자 스스로의 사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서법 정립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진체(晉體)를 바탕으로 미법(米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창안한 옥동체인데 이를 보통 '동국진체'라 말하고 있다.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와 백하 윤순(1680~1741)을 거친다. 그런데 녹우당 공재 윤두서의 화첩 속에는 '적표마도赤驃馬圖'라는 작품이 있다. 공재가 그린 이 작품은 화려한 치장을 한 말위에 올라탄 장부의 모습을 그린 기마인물도다. 화면 오른쪽에 '동해상인東海上人'과  '공재恭齋'의 주문방인이 찍혀있는데 제발문을 쓴 것은 백하 윤순이다.

시문 말미에는 적표마가를 중화仲和(윤순)가 성보成甫를 위하여 쓴다고 되어 있다. 백하 윤순은 원교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공재의 그림에 제발문을 쓴 것으로 보아 공재와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두서의 '적표마도'에 쓴 백하 윤순의 글 동국진체의 맥을 이광사에게 전해 준 윤순의 글이 공재 윤두서가 그린 적표마도에 들어있다. ⓒ 정윤섭

  
유배지에서 터득한 동국진체

동국진체는 윤두서와 윤순의 서법을 계승한 이광사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인생 여정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 유배라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광사는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의 서얼 왕자였던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으로 호조판서 석문 이경직의 현손이며, 예조판서 이진검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양명학자(강화학파)로 육진팔광(六眞八匡)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진검은 1721년 노론 4대신을 탄핵하던 중 밀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는데 이광사는 당시 17세였다.

이광사는 1755년 나주 괘서사건으로 백부 이진유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51세에 함경북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부친도 아니고 백부로 인해 유배를 당한다. 사건 당시 이광사가 옥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이 소식을 들은 부인 문화류씨가 자살하였다. 또 다른 가족사의 비극이다. 유배지 부령에서는 그곳의 문인에게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58세에 신지도로 이배되었다.
 

신지도 금곡마을 이광사 적거지 신지도 금곡마을 회관뒤에 옛 모습이 남아있는 이광사 적거지가 있다. ⓒ 정윤섭

이광사가 유배생활을 하였던 신지도 금곡마을은 완도 본섬에서 신지대교를 건너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는 곳으로 가다 신지면사무소에 서북쪽으로 약 6백여 미터를 가면 나온다.

금곡마을 입구에서 마을회관 쪽으로 가면 마을회관 뒤쪽에 이광사가 유배생활을 하였다는 적거지가 있다. 입구 담벽에는 대곡77번길33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동안 민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이 집은 오랜 세월속에서도 현대식으로 고쳐지지 않고 섬 지역 민가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섬 지방 민가 건축연구에도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부디 이 건물이 잘 유지보존 되기를 바란다. 
 

이광사 적거지의 귤나무 이곳의 따뜻한 기후 탓인지 노랗게 익어가는 귤이 인상적이다. ⓒ 정윤섭

 
이광사 적거지는 입구에서 부터 돌담과 오래된 건물이 주는 옛스러움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적거지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남해안 지역의 따뜻한 날씨 탓인지 마당 한 켠에는 꽤 큰 귤나무에 노랗게 익어가는 귤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주렁주렁 열려 있어 인상적이다.

이광사는 1762년 신지도에 유배와 15년 동안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서예의 체계적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완성해 가장 한국적인 서체의 모태가 된 '동국진체'를 완성하게 된다.

사찰 현판이 유독 많은 이광사 서체

이광사는 그의 독특하고 웅혼한 필력 탓인지 사찰의 대웅전 현판 글씨가 많기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해남 대흥사에는 '대웅보전', '침계루', '천불전', '해탈문' 의 글씨가 모두 이광사의 글씨다. 마치 이광사의 서체 전시장 같다. 인근 강진 백련사의 대웅보전 현판 또한 이광사 글씨다. 그리고 지리산 천은사를 비롯 고창 선운사, 김제 금산사에서도 이광사의 현판 글씨를 볼 수 있다.

대흥사는 조선후기 최고의 필력을 자랑하는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와의 인연으로 거쳐 간 곳으로 추사가 남긴 글씨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한바탕 자존심 싸움이 남긴 일화도 회자된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는 길에 이곳 대흥사를 들렀는데 이광사가 쓴 대웅전 현판 글씨를 보고 볼품없는 글씨라고 혹평을 하며 당장 떼어 버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도 제주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난 후 해배되어 대흥사에 들렸을 때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이광사의 글씨를 칭찬하였다는 이야기다.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이광사는 사찰의 현판 글씨가 많은데 대흥사에는 유독 이광사의 글씨가 많다. ⓒ 정윤섭

현재 대흥사의 대웅보전은 이광사 글씨고 대웅보전 바로 옆 백설당에 붙어있는 무량수각은 추사글씨로 이들 최고 명필들의 글씨가 나란히 걸려 있어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 있다.

이광사는 추사의 마음을 미리 예견한 것인지 "마음의 바탕이 밝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학식의 도량이 부족하여 문기(文氣)가 죽은 사람의 글씨는 재주와 필력이 있어도 한낱 글씨장이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광사가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동국진체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동국진체라는 예술의 탄생이 고립된 섬이라는 공간속에서 유배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시간이 갖는 의미를 더욱 뜻 깊게 한다.

이광사는 해배되지 못하고 신지도에서 생을 마치게 되니 향년 73세였다. 비교적 장수한 생이었지만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되어 굴곡진 생의 끝이 외롭게 느껴진다.
#동국진체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 #신지도 #유배지 #원교 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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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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