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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 최대 수난기 임진왜란ㆍ병자호란 저술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60회] 정약용의 역사의식은 남달랐다

등록 2020.10.29 17:01수정 2020.10.2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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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강진군청 홈페이지 캡처

 
역사의식이 없는 지식인을 참된 지식인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를 의식하지 않는 지식인이란 '지식상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공분야가 무엇이든 '역사'에 바탕하지 않은 활동은 자칫 자신은 물론 이웃과 나라를 해치게 된다. 한말 이완용 등 고위 관리들이나 일제강점기의 친일파가 된 지식인들 그리고 지금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위장한 지식인 그룹의 공통점은 '역사의식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정약용의 역사의식은 남달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해 쓴 책에서 투철한 역사의식을 거듭 살피게 한다. 임진왜란을 다룬 『비어고(備禦考)』와 병자호란 관련 『민보의(民堡議)』는 일제강점기에 편집 간행된 『여유당전서』에도 싣지 못할만큼 그들에게는 민감한 내용이 많은 저술이었다. 강진에서 1812년에 홍경래 난의 소식을 들으면서 이 책들을 지었다.

『비어고』의 제1부 임진왜란의 목차를 살펴보자. 제1장 임진왜란, 제2장 김성일의 일본사행, 제3장 정발의 부산싸움, 제4장 신립의 달천 패배, 제5장 선조의 의주피란, 제6장 이순신의 한산도 승리, 제7장 3도 군사의 용인 패배, 제8장 정문부의 함경도 수복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책 제2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정묘호란, 제2장 병자호란을 일으킨 트집, 제3장 병자호란, 제4장 유림의 탑골전투, 제5장 강화도의 함락, 제6장 삼학사의 절개, 제7장 청나라 군사의 가도함락, 제8장 강도(江都)가 무너진 사실 등으로 엮었다. (주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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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다산초당. ⓒ 신정임

 
『민보의』의 목차도 살펴보자.

1. 전체의 뜻. 2.민보의 땅을 가리는 법, 3. 보원(堡垣)의 제도, 4. 민보방어법. 5 민보의 대오 편성법, 6. 민보의 양식 지급법, 7. 민보의 농사짓는 법, 8. 민보의 밤을 경계하는 법, 9. 민보가 서로 구원하는 법, 10. 바닷섬에 민보를 설치하는 법, 11. 산사(山寺)에 민보를 설치하는 법, 12. 민보의 적군을 정찰하는 법, 13. 민보의 상벌법, 14. 민보에 대한 손님의 질문에 답한다. 15. 천파(天杷)에 대한 그림돌이, 16. 호창거설(虎倀車說), 17. 대둔산 축성의. (주석 11)

목차만 훑어봐도 어떤 책인지 알만하다. 선조와 인조는 둘 다 무능한 군주여서 선조는 남쪽 왜적의 침략으로, 인조는 북쪽 호적의 침략으로 그때마다 인민이 도살당하고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1637년(인조 15) 1월 인조가 청에 항복하고 청나라 연호를 쓰게 되면서 한 때(효종대에) 북벌정책을 쓰기도 했지만 이후 순조대에 이르면서 세도정치로 삼정이 문란해지고 국가안보는 허울뿐이었다.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를 수장으로 하는 평안도 농민들이 봉기하여 열흘 만에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10여 개 군현 지역을 장악했을 정도로 관군의 대비는 허술하였다. 그는 「애절양」을 지어 전정(田政)ㆍ환곡(還穀)과 함께 군정(軍政)의 부패상을 질타하다가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 『비어고』와 『민보의』를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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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이상명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북쪽으로 피난갈 때의 참절했던 상황의 한 대목이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니 백성과 신하들도 제살길을 찾아 각자도생의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이다.

6월 12일 임금께서 안주(安州) 운암원(雲巖院)에 이르렀으나 인민이 피란하여 흩어져 마침내 끼니를 걸렀다. 임금이 사관을 불렀으나 모두 이미 흩어져 가고 이로부터 여러 좇던 관리는 모두 뒤처져 임금 수레를 쫓는 자는 10여 명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마음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위자가 많지 않았다. 저녁에 안주에 이르렀다.

6월 13일 임금께서 영변에 이르렀으나 성중의 사람과 가축이 모두 이미 흩어져 가서 위아래 사람이 모두 끼니를 걸렀다. 이날 밤에 한응인이 달려와 아뢰기를, 왜적이 이미 강동(江東) 외탄(外灘)을 건넜다고 했다. (주석 12)


주석
10> 『정약용 저, 정해렴 역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8~11쪽, 현대실학사, 2001.
11> 앞의 책, 12~13쪽.
12> 앞의 책, 5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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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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