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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외톨이에 사회 부적응 주부, '날개'를 찾다

[리뷰]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20.10.12 14:48최종업데이트20.10.1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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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갔어, 버나뎃 > 포스터 ⓒ 디스테이션

 
코로나19 시대, 본의 아니게 '언택트'한 삶이 이어지는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 혼란'을 불러온다고 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평소와는 다르게 만든다. 아마도 미래의 누군가는 지금 이 시대를 '우울의 시대'라 정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그로 인해 행동마저 위축되는 증상은 과연 '코로나'가 사라지면 없어질까? 어쩌면 코로나 이전부터 우울은 우리 삶에 배태되고 있었던 것 아닐까? 

여기 남편과 주변으로부터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낙인찍힌, 그래서 정신병동으로 강제 이송될 위기에 처한 한 여성에게서 그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바로 <어디갔어, 버나뎃>의 버나뎃 폭스가 그 주인공이다. 

은둔형 외톨이, 버나뎃

한적한 시카고의 교외 주택가. 정갈하게 손질된  단독 주택들이 이어진 이곳에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블랙베리 덩굴을 뒤집어 쓴 집 한 채가 있다. 옆 집에 사는 오드리가 정원사를 앞세우고 찾아와 덩굴을 쳐낼 것을 요구할 정도로 엉망인 이 집에는 버나뎃 폭스(케이트 블란쳇 분)가 그의 남편 빌리(빌리 크루덥 분), 딸 비(엠마 넬슨 분)와 함께 살고 있다. 

버나뎃 폭스가 '문제 인물'로 취급당하는 건 집 주변을 정리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마치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도 가진 것처럼 이웃은 물론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린다. 딸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 사회에서 그녀는 '은둔형 외톨이'다. 그런데 그녀 입장에선 그저 '은둔'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교하는 딸을 데리러 간 버나뎃의 과격한 행동은 그를 소문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버나뎃으로선 '소문'을 불평할 수만도 없다. 그는 오드리 등을 비롯하여 주변 엄마들을 '각다귀'라 부르며 적대적으로 대하다 못해 '각다귀' 운운하는 플래카드까지 내걸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주변 사람은 물론, 남편에게조차 쉽게 이해받지 못한다. 
 

<어디갔어, 버나뎃 > 포스터 ⓒ 디스테이션

 
그렇게 온라인 비서 '만줄라'에만 의지해 극단적으로 세상과 '단절'을 자처했던 버나뎃의 삶에 변화가 들이닥쳤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갈 딸이 졸업 기념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남극 여행을 제안한다. 버나뎃은 바쁜 남편이 거절해주길 원했지만, 남편은 하나 밖에 없는 딸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어 얼버무리고 만다. 결국 가족 남극 여행이 결정되고, 버나뎃은 '멘붕'에 빠진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가같은 블랙 베리 덩굴 지지대를 잃은 버나뎃집 쪽의 언덕이 폭우를 버티지 못하고 한창 학부모 모임으로 들썩이던 오드리네 집 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버나뎃이 유일하게 의지해왔던 온라인 비서 만줄라가 러시아를 기지로 한 범죄 집단이라며 집으로 FBI가 들이닥친다. 안 그래도 주변인들로부터 버나뎃과 관련된 사건들을 전해들으며 우려를 키워온 남편 빌리는 버나뎃을 '정신과 강제입원'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난데없이 나타난 FBI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정신과 치료진을 앞세운 남편까지.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데 버나뎃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듯, 땅으로 꺼진 듯 버나뎃이 자취를 감췄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드러난 사건 자체로만 보면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이 심해 '자살' 우려가 있는 주부의 실종이지만, 그 속에는 '좌절한 건축가이자, 독박 육아로 지친 주부' 버나뎃이 있다. 

지금은 흉물같은 시애틀 교외의 집에 살면서 커다란 선글라스를 낀 채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한때 버나뎃은 이미 20대의 나이에 건축계의 아이콘이 되었던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녀가 건축한 집이 곧 '이슈'가 되었던 시절, 그는 당대 내로라하는 중견의 남성 건축가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야심찼던 젊은 건축가 버나뎃의 열정은 그녀가 건축한 집이 단 몇 달 만에 '철거'되는 '사건'과 함께 주저앉았다. 

남편과 함께 LA를 떠나 시애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온 버나뎃.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건축가로 새로이 시작해보려 하기도 전에 그녀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닥쳤다. 버나뎃은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유산을 몇 번이나 거듭했고 겨우 태어난 아기는 생사조차 불투명했다. 자신의 일은 전폐하고 오로지 아이를 키우는 데만 전력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느라 가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안팎으로 상처를 받은 버나뎃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단절'이었다. 하나 뿐인 딸 '비'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엄마였지만, 딸을 제외한 모두에게 버나뎃은 벽을 세웠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간은 동시에 불면과 불안과의 싸움이었다. 

버나뎃, 자신을 넘다 
 

<어디갔어, 버나뎃 > 포스터 ⓒ 디스테이션


서점에 가면 '우울'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넘쳐난다. 안 그래도 집단에서 고립된 원자화된 개인의 우울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병리 현상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사회적 경향성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우울증이라 대변되는 '불면'과 '불안'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표적 '방어 기제'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상실감에 빠진 한 여성의 상황을 통해 우리 사회 보편의 '아픔'을 길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하듯 버나뎃의 인생 역전을 통해 아픔을 승화시킨다. 우연히 식당에서 예전 동료를 만난버나뎃은 두서없이 그리고 장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고, 동료는 명쾌하게 진단을 내렸다.

"버나뎃, 너는 다시 건축을 해야 해. 너같은 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고통스럽지."

그렇다면 사라진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저 처음에는 정신 병원 입원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버나뎃은 우선 딸과 약속했던 남극 여행선에 몸을 싣는다. 사람과 부딪치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버나뎃에게 심지어 해류에 따라 요동치는 남극행 여행선은 그 자체로 '지옥행'이었다. 하지만 버나뎃은 배 창문을 통해 본 순백의 남극 빙산에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 다가선다. 그리고 우연히 듣게 된 소식이 오랫동안 침잠했던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을 깨운다. 

84주 연속으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던 마리아 샘플의 동명 원작은 영화와 달리 편지, 이메일, 문자 메시지, FBI서류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이 색다른 구성의 원작을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와 <보이 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버나뎃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건축가로서의 좌절과 엄마가 된 뒤에 얻은 상처를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 주부'로, 그리고 다시 열정 충만한 건축가로 표현해 내는 데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역할이 컸다. 

남극 바다에서 대번에 자신의 열정을 되살렸다는 상황은 '코미디'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우연적이거나,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라는 지점이다. 영화는 그런 '나와의 직면'을 위해 남극이라는 장치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며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가둔 울타리를 벗어나라 독려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어디갔어 버나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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